산길탐구
용호구곡(龍湖九谷)
일 시 : 2014. 6. 29.
동 행 : 아내와 나
오늘 산행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35주년 기념산행이다
대학 4학년 어느 날 동아리의 하계봉사를 앞두고 사전준비 모임을 가졌는데 당시 아내는 1학년이었다
난 그때 아내의 참석을 의식하지 못했는데 훗날 들으니 그 자리에 아내도 참석했었고
숙맥같은 희멀건 사람 정도로 기억한다고 했다
얼마 후 벽지로 떠난 하계봉사에서 비로서 아내가 보였고 그후 7년 뒤 식장에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그렇게 어느덧 시간은 흘러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지금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돌이켜 보니 35년도 결국 잠간이기에 세월이라 이름한다
산행기와는 별 관련없는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한화휴제(閑話休題)하고.....
산행은 아내의 능력에 맞춰 길이 아주 잘나 있고 난이도가 평범한 곳을 선택하되
인근 지역 토굴을 찾아 잠간이나마 산중한담을 할 수 있는 곳도 곁들이기로 한다
1. 숙성치 토굴
용호구곡만 산행하고 돌아가기에는 오고가는 시간이 아까워 들릴 만한 곳을 한곳 더 찾아보는데
지리산길지도 상 구례 산동면과 남원 주천면 경계에 위치한 숙성치 아래 토굴 표시가 되어 있다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지 않아 용호구곡 산행 전에 먼저 찾는다
19번 국도를 따르다 구례 산동면 계천리의 계척 마을로 빠져 견두산 등산로 안내표시를 따라 올라
밤재 고개 조금 못미친 곳에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과거 아내더러 지리산에 같이 가자고 하여 산길도 없는 곳을 여러차례 데리고 다녔더니 길이 아닌
곳에 대해서는 넌더리를 내며 앞으로 그런 산행은 절대 따라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놓았었다
들머리로 들어서니 발길이 자주 닿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고 관목도 제법 우거져 있어
한소리 하겠다 싶어 뒤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니 군말없이 잘 따라온다
가마바위 고개를 넘어 토굴을 찾아드니 스님은 떠난 지 오래되었고 토굴은 허물어져 가고 있다
가마바위 고갯마루에 서서 토굴을 바라볼 때부터 입안 가득 감돌았던 차맛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대신
텁텁한 입맛만 쩝쩝거린 채 숙성치 방향으로 올라 주차한 곳으로 되돌아 오게되니 초장부터 김 샌 기분이다
바로 차를 몰아 내려가 밤재터널을 통과하여 용호구곡으로 향한다
< 들머리 >
< 좁쌀풀 >
< 가마바위 고개 >
< 토굴 >
< 숙성치, 지리산길 4.0 에는 숙성치 표기에 가마바위 고개로 되어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 >
< 딱총나무, 가지를 꺽으면 `딱`하는 총소리가 난다고 하여 딱총나무이다 >
< 괴불나무, 열매가 개 불알처럼 생겼기에 괴불나무이다 >
< 날머리 >
2. 구룡계곡(용호구곡)
지리산의 북서 외곽지역인 남원 방면은 나의 산행에서 제일 드문 곳이다
운봉 수철리는 최근 세거리골을 산행하느라 세 차례 정도 들렸지만 남원 주천면은
여태 한 차례도 찾은 적이 없으니 구룡계곡 산행은 오늘이 당연 처음이다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에서 육모정 계곡을 따라 산, 물, 나무, 바위의 4가지가 모두가 갖추어져
천하제일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하여 남쪽의 금강산이라 일컬어진다
음력 4월 초파일이면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군데의 폭포수에서 노닐다가
승천한다하여 용호구룡계곡이라 불리는데 그 폭포들마다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전해오는 바
그 전설을 찾아 보려한다
제1곡-송력동(松瀝洞)
육모정 아래 대형버스 주차장에서 계곡에 걸쳐진 구름다리를 건너 계곡 우측 산길을 따라 들어가면
소나무가 제법 울창하고 축대를 쌓은 곳이 나오는데 남쪽 방향에서 작은 지계곡(음부골)이 흘러
구룡계곡과 합류하는 곳이다
남쪽 지계곡을 따라 몇 걸음 들어가면 깍아지른 바위로 맑은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니
송림 약샘물이라 하고 일명 여궁석(女宮石)이라 부르는 곳이다
풍수적으로 이곳의 음기가 너무 세어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을 염려한 인근 호경 마을에서
음기를 차단할 목적으로 축대를 쌓고 소나무를 베지 않아 다른 곳에 비해 유독 소나무가
많은데 일종의 비보풍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송력동이 정규탐방로 상에 있지않아 그 위치를 탐문하려 호경의 한 영감에게 물었다
' 영감님 여기 약수터가 어디있습니까 ? "
>> " 모르겠는데 "
" 그러면 여궁석은 어디입니까 "
>> " 그런 것도 몰라 "
" 그럼 여자 거시기 닮아 그 물로 목욕하면 아들 낳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은 모르세요 ? "
>> " 아~ 보지바위~"
보지바위란 대답에 난 옆에서 대화를 듣고있는 할머니한테 괜스레 머슥해져 눈치가 보이건만
영감은 전혀 게의치 않고 두 손까지 모아 그 형상을 만들어 가며 자세히 알려줘 찾을 수 있었다
< 송력동 축대와 소나무들, 너머로 음부골이 있다 >
< 보지바위,
조선 5백년의 유교적 윤리개념이 유전적 DNA화 된 점잖은 이들에겐 분명 상스러운 단어이기에
멋있게 한자말로 女宮石이라 했을 것이다
개불알꽃도 상스럽다고 여겨 복주머니란으로 바꾸었듯이.......
열매가 개의 불알을 닮은 괴불나무도 철자가 변형되지 않고 개불나무였다면 어떻게 바뀌었을까 ? >
제2곡-용호동(龍湖洞), 옥룡추(玉龍湫)
60번 지방도가 계곡 좌측으로 이어지지만 송력동에서 계곡 우측 산길을 따라 걷다보면
얼마 후 용호정이 나타나고 이후 좌측으로 다리를 건너면 육모정이 보인다
육모정에 이르기 전 60번 지방도 좌측의 석벽에 용호석문(龍湖石門) 네글자가 뚜렸하다
조선 후기 명필 창암 이삼만(蒼岩 李三晩. 1770~1847)의 글씨로 전하는데 곁에는
방장제일동천의 각자도 보인다
육모정 위 탐방지원센터 가기 전 영송 김재홍(嶺松 金在洪)이 세운 용호서원(龍湖書院)이 있는데
출입을 금하여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다
< 용호석문 >
< 방장제일동천 >
< 용호정 >
< 육모정 >
< 육모정 옛터, 1960년 큰비로 유실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
< 옥룡추, 용소 >
제3곡-학서암(鶴捿岩)
< 학서암 >
탐방지원센터에서부터 정규탐방로가 시작되는데 학서암은 학들이 떼지어 살며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60번 지방도가 계곡 좌측에서 우측으로 횡단하는 삼곡교 아래 부위이다
호의 형세가 잠시 평탄한 흐름을 나타내어 백명이 앉을 만한 반석과 만 섬 물길이 회류하는 맑은 연못은
평이한 흐름 속에서 기이한 볼거리를 얻을 수 있다
학서암 각자는 수재로 파손되어 현재 남아있지 않다
송력동의 여궁석(보지바위)과 대칭되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남근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파손되었는지 찾을 수 없다
제4곡-서암(瑞岩), 챙이소
학서암의 계곡을 따라 약 400~500m쯤 가면 유난히도 흰돌이 물바닥에 깔려 있고
오랜 세월 물에 깍인 돌마다 반들반들하고 층층으로 쌓여 기묘하다
칠성암은 일곱 사람이 힘을 합하여 지었다 하여 칠성암이고
서암은 바위가 중이 꿇어 앉아 독경하는 모습이라 하여 서암이라 한다
구시소외 챙이소 사이를 훑어보는데 서암 각자가 쉬이 띄지 않아 계곡을 건너 반대편을 샅샅이 살피며
내려가다 서암 각자를 찾는다
각자가 산사면의 바위 윗부분에 위치해 있어 나무를 타고 올라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하여 어렵사리 사진을 찍는다
칠성암터는 챙이소 바로 옆으로 와편 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근래 뽕나무밭 등의 경작지로 사용되었기도 하지만 김사문(1889~1973)의「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에
" 칠성으로 초막 이름을 지은 것은 일곱 명의 뜻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지었기 때문이다 " 라는 구절이 보이는 바
애당초 초막이었기에 당연히 와편이 있을 수 없다
수확한 곡식을 까불러 티끌이나 쭉정이를 골라내는 키를 전라도 방언으로 챙이라고 하는데
소의 형태가 챙이처럼 생겼다 하여 챙이소이다
< 4곡 瑞岩 >
< 구시소,
바위의 모양이 소나 말의 먹이통인 구유처럼 생겼다고 하여 지방 사투리인 구시를 써서 구시소라 한다>
< 챙이소 >
< 챙이소 >
< 히어리 >
< 자귀나무, 합혼수 >
< 말채나무, 가지가 낭창낭창해 말의 채찍으로 쓰기에 좋다고 하여,
잎이 마주 나면 말채, 어긋나게 달리면 층층나무이다 >
제5곡-유선대(遊仙臺), 은선병(隱仙屛)
바위에 금이 많이 그어져 있어 선인들이 바둑을 즐겼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유선대라 하고
주위 절벽은 선인들이 인간에게 보이지 않게 병풍을 친 것 같다하여 은선병이라 부르는 곳이다
< 은선병 >
< 유선대 >
제6곡-지주대(砥柱臺)
비폭골이 구룡계곡과 합수되는 부위 주변에 위치하였는데 둘레의 기암절벽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모양새여서 지주대라 한다
아내는 산행 초반부터 저만치 앞서 나가 보이지 않는다
난 사진 찍고 gps경유지 기록하느라 꾸물대다보니 자꾸 늦어졌다
아침으로 김밥 한줄만 먹었더니 지주대 부근에 이르러서는 허기로 고꾸라질 지경이었는데
지주대 부위에서 겨우 아내를 따라잡아 햄버거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어쨌든 너무 잘 살려놓은 부작용이다
근래 아내는 약간의 운동에도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상황를 직감하고 심장의 관상동맥조영술을 받게 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협착이 발견되어 바로 조치를 취했다
당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였는데 난 우스개 소리로
" 이건희는 비서를 잘 만나 살았지만 넌 남편을 잘 만나 사는 거야 "
< 지주대 >
제7곡- 비폭동(飛瀑洞)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가로 놓인 바위를 문암(文岩)이라 하고 윗쪽 우뚝 솟은 봉우리를 반월봉이라 한다
반월봉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의 폭포가 가히 하늘에서 날아 오르는 형상이라 하여 비폭동이라 부른다
옛날 이런 이름을 지은 사람 모두가 한결같이 감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건지
아니면 뻥이 심한 건지 대체 구분할 수 없네그랴.....
< 비폭동, 가뭄이 심해 그냥 졸졸 거리는 수주일뿐이다 >
< 작살나무 >
< 말발도리 열매, 말의 발굽 모양이라고 하여 말발도리가 되었다 >
제8곡-석문추(石門湫), 경천벽(擎天壁)
거대한 암석층이 계곡을 가로질러 물 가운데 서 있고, 석벽이 허공에 닿아 우러러 보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석벽이란 의미의 경천벽이다
또한 바위 가운데가 대문처럼 뚫려 물이 그 곳을 통과한다 해서 석문추라고도 한다
김사문의 「용호구곡경승안내(龍湖九曲景勝案內)」에서처럼 옛부터 건기가 아니면 위험해
바로 통과할 수 없어 우회해야만 했던 구간인 것 같다
" 이로부터 곧장 제구곡에 이르고자 하면 거꾸로 선 석벽에 발을 걸고 어지러운 물결에 머리를 감지
아니하고는 붙잡고 오를 방법이 없으니, 만일 용감히 나아가고 돌아보지 않아 목숨 건 자가 아니거든
지팡이를 돌리는 편이 십분 옳을 것이다 "
< 경천벽 맞은편의 탐방로 부위 >
< 경천벽에서 아래 비폭동 방향으로 보고 찍은 사진, 좌측 석벽에 경천벽 각자 >
< 8곡 擎天壁 >
< 경천벽에서 위 구룡폭포 방향으로 보고 찍은 사진 >
< 붉나무, 가지에 날개가 있다 >
제9곡- 교룡담(交龍潭)
교룡담은 용호구곡의 최상류로 두 갈래의 물줄기로 이루어진 폭포가 아래 각각의 조그마한 못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용 두 마리가 어울렸다가 못 하나씩을 차지하고 물 속에 잠겼다가
구름이 일면 다시 나타나 서로 어울리는 듯하여 교룡담이라 한다
< 구룡폭포 >
< 교룡폭포 옆 바위의 각자,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분명 자연훼손이요 낙서에 지나지 않아 지탄받고도 남을 일이다
지리산 처처 계곡변과 능선상에서 볼 수 있는 각자들에 대해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
양반입네 하고 말 타고 종까지 데리고 한두 번 지리산에 다녀가면서
이름 석 자랑 그 흔적을 남겼을 진데 어떤 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
나도 지금 도처에 흔적을 남기면 몇 백년이 흐른 후 가치를 인정받기나 할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였거늘 이렇게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난 써자마자 흔적없이 지워질망정 용호구곡 흐르는 물에 `다우 서영도`라고 적어볼까
영겁의 세월 속에서 보면 바위에 새긴 각자랑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잘 풀리지 않은 화두를 붙잡은 선승들이 느끼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은 아닐지라도
종종 이렇게 풀리지 않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
< 구룡사
구룡폭포 직전에 좌측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면 구룡사로 이어진다>
< 산돌배 >
< 굴피나무 열매 >
산행 초반 송력동의 보지바위를 확신하지 못해 사진을 찍지 못했다
하산길에 다시 송력동을 찾았을 때 더위를 식히고 있는 노인을 만나 확인한 후
사진을 찍고 되돌아서는 순간 발밑이 미끄러워 벌렁 뒤로 자빠졌다
그동안 지리산에서 받아 축적된 나의 양기를 감지했음인지 보지바위가 적잖이 질퍽거렸기 때문이다
송력동 보지바위의 음기가 세다는 소문을 직접 확인한 순간 치고는 너무나 아찔했다
용호구곡이 첩첩의 산들과 계곡, 기기묘묘한 바위들, 폭포와 소들로 어우러진 절경을 자랑한다고 하건만
근래의 가뭄으로 수량이 줄어 그 절정의 아름다움과 청신함을 제대로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아내의 건강한 발걸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게 무엇보다 의미있는 하루였다
더구나 35주년 그 자체의 의미 이상 더 무엇을 바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