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1917, 숭양산인, <지리산록(智異山錄)>

엉겅퀴 | 946

〖읽어두기〗

 

『지리산록(智異山錄)』은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 1864-1921)선생이 쓴 글이다. 1917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숭양산인(崇陽山人)이란 필명으로 2.28~3.10까지 9회에 걸쳐 연재한 것이다. 매일신보는 당시 총독부의 기관지였으며, 숭양산인(崇陽山人)은 말년에 그가 즐겨 썼던 호(號)이다.

이 글은 유산기가 아니라 지리산에 관한 종합보고서 격으로, 고금의 여러 기록을 취합하여 편집한 것이다. 기록간에 모순도 있고 사실과 어긋난 부분도 있다. 지리99 회원이면 그 정도는 분별할 수 있으리라 본다. 지금이야 인터넷시대에 자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우리가 보기엔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많이 읽고 널리 들은 바가 없으면, 또 기억력이 비상하지 않으면 이런 글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원문은 토씨 외에는 거의 한문투라 풀어 썼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박탈당하자 선생은 비분에 찬 글을 쓴다.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이 날을 목놓아 통곡하노라」이 그것이다. 1905.11.20 『황성신문』에 실렸으며, 선생은 당시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다.

“ ~<전략>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중략>~ 아아, 원통하다. 아아, 분하도다. 우리 이천만,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한 밤 사이에 홀연히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그런 선생도 말년에는 친일활동을 하였다. 내가 철들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3.1 독립선언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던 많은 사람들이 친일로 변절한 것만큼이나 충격이었다. 사람이 한결같기가 이렇게나 힘든 일일까?

 

지리산록1.jpg

     

△ 당시의 제1회 연재 신문 스크랩

 

智異山錄(지리산록)

 

 

이 땅에 명산이 둘 있으니 금강산과 지리산이 그것이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하여 제주의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이라 칭하니 진시황이 방사(方士) 서복·한종 등을 보내 삼신산에서 불사약을 구하게 했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한라산은 멀리 섬 가운데 있어 놀러가서 오르기가 쉽지 않고 오직 금강산과 지리산만이 옛날부터 신선과 불도를 닦는 자, 은자들의 노닌 흔적이 많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이 금강산이 명승인 것만 알고 지리산을 잘 모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두보의 "방장산은 삼한 밖에 있고(方丈三韓外)"라 한 시의 주(注)와 통감집람(通監輯覽)에서 모두 "방장은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대방군은 바로 지금의 남원이다. 지리산을 둘러싼 고을은 십 수 개이니 그 북쪽은 운봉 함양 안의요, 그 남쪽은 곤양 하동이요, 그 동쪽은 단성 산청 진주 삼가 등이요, 그 서쪽은 구례 남원 등이다.

산에는 소나무 삼나무 가래나무 잣나무 박달나무 느릅나무 등의 재목과, 감 밤 의 여러 과수나무와 버섯 약재 금석 대나무화살 등속의 여러 산물이 풍족하여 산 주위의 모든 고을이 이 산을 바라고 산다. 또 죽로차가 생산되는데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김렴(*김대렴의 착오인 듯)이 차 씨앗을 갖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더니 성덕왕 때에 이르러 무성하게 번져 차를 바치게 되었다. 하연(河演 1376-1453)의 시에

“晋地風味臘前春(진지풍미납전춘) 진주 땅의 풍미를 봄 되기 전 섣달에 맛보니

  智異山邊草樹新(지리산변초수신) 지리산 자락 초목들이 새롭게 느껴지네

  金屑玉糜煎更好(금설옥미전갱호) 금과 옥 같은 가루를 달이니 더욱 좋고

  色淸香絶味尤珍(색청향절미우진) 색은 맑고 향기도 뛰어난데 맛은 더 훌륭하여라”고 읊은 것이 이것이다.

그런즉 지리 一山은 명승으로 논하는 것뿐만 아니라 널리 사람과 만물을 구제한 것이 어찌 금강산이 비길 수 있겠는가?

지리산은 진주 서쪽 100여 리에 있는데 백두산의 맥이 동쪽으로 뻗어나가다가 북쪽으로 꺾여 장백산‧마천령이 되고 또 동쪽으로 나아가 황룡산이 되고 동으로 달려 대관령이 되고 바다와 나란히 천리를 가 추지령이 되었으며 용솟음쳐 개골산 만이천봉이 되었다. 또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오대산이 되고 동해를 만나 머리를 꺾어 서남쪽으로 나아가 태백 소백이 되고 또 서쪽으로 죽령 주흘산 계립령 백화산 등의 여러 산과 고개가 되었다. 또 서남쪽으로 삼도봉이 되고 남하하여 덕유‧금원이 되고 다시 서남쪽으로 반야봉이 되니 반야는 지리의 첫봉우리이다. 여기서부터 웅장하게 서려 특별하게 빼어난 것이 천왕봉이 되었으니 이는 지리산의 가장 높은 꼭대기이다. 산맥이 백두산에서 왔다고 두류(頭流)라 하니 다하여 남해에서 멈추었다.

감여가(堪輿家 *풍수가)들의 설에 의하면, 지리산의 맥이 구불구불 바다 밑으로 흘러 일본의 부토산(富土山 *후지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비록 믿기 어려우나 고금의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보아서 그런 설이 있는 것 같다. 그 형태가 方形이어서 열어구(*列子)는 방호(方壺)라 하여 원교(圓嶠)와 짝을 이루게 하였고, 사마천의 진시황기와 반고의 교사지(郊祀志)에 모두 방장(方丈)으로 봉래 영주와 함께 일컬어졌으니 천하의 명산이다. 기이한 봉우리와 날카로운 절벽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오직 천왕과 반야의 양봉우리만 가장 높다. 비록 산허리에는 구름과 비 우레와 번개가 일어도 그 위에는 맑으니 세상에 전하기를 태을(太乙)이 그 위에 산다 하여 뭇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요 또 고승대덕이 머무는 곳이다.

고려 때 이 산에 은거한 명사가 있어 품행이 고결하고 세상일을 관여하지 않았는데 이때 왕이 듣고 사신을 보내 불렀으나 사양하며 말하기를, “외신(外臣)은 아는 바가 없어 왕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하고는 문을 닫고 나오지 않거늘 사신이 지게문을 밀치고 들어가 보니 벽에 한 구절이 써 있었을 뿐, “한 조각 임금의 말씀 골짜기로 들어오니, 비로소 이름이 인간세상에 떨어진 줄 알겠네.(一片絲綸入洞 始知名字落人間)”라 하고는 북쪽 창으로 달아났으니 후인들은 한유한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지리산은 4~5백 리를 차지하고 앉아 동쪽으로 오르는 자는 산청의 경계를 따라 오르고 남쪽으로는 하동의 화개 악양에서, 서쪽으로는 구례에서, 북쪽에서는 함양 운봉에서 오르는데 이 모든 것이 지리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고려의 김부의 김돈중 이목은 이쌍명재 이래로 유산기를 작성한 것이 무려 몇 백 부나 되지만 모두 같지 않은 것은 그들이 간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쪽에서 오르는 것이 편리하므로 시험 삼아 동쪽 길을 택하여 기록한다. 산청 남사천에서 길게 둘러 10여 리를 가서 고개를 넘어 왼쪽으로 큰 시내를 끼고 나아가면 도구대가 있다. 명종조의 도구처사 이제신의 옛집터이다. 사람됨이 불우함에 처해서도 매우 활달하고 을사사화 이후로 욕망을 버리고 세상 밖에서 놀며 항상 시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이때 조남명은 도의를 가슴에 품고 뜻이 크고 도도하여 마음을 허한 사람이 적었는데 오직 도구공에게만 개의치 않고 사귀었다.

몇 리를 더 가면 탁영암에 이르는데 물이 여기에서 흰바위를 덮고 푸른 이끼를 ㅇㅇ하여 맑고 깊은 물이 투명하고 검푸른 것이 이상하게도 서늘하게 정신을 상쾌하게 하고 마음을 씻어주는 즐거움이 있다. 여기서부터 입덕문을 따라 들어가면 조남명 선생의 덕산서원과 산천재가 있는데 서원 건물은 허물어지고 무너진 담장과 깨어진 주춧돌에 오직 신도비만이 황량한 풀밭 가운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천왕봉의 한 가지가 동남쪽으로 흘러와 오대산이 되고 노현(蘆峴)이 되어 살천의 앞에서 동으로 가로놓이고 또 한 가지는 동북에서 내려와 조흘산이 되고 운상산이 되어 삼장 앞을 가로지르면서 둘러싸 덕천을 만들었다. 살천의 뒷산은 구곡이고 삼장의 뒷산은 저전(楮田)이다. 천왕봉의 물이 법계사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살천촌을 경유하여 사제봉(社祭峯) 아래에 이르러 살천이 된다. 또 조흘산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上流庵)을 거쳐 장항동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이 되고 양당촌 앞에서 살천과 합쳐 덕천이 된다. 구불구불 돌고 이리저리 꺾여 수양(首陽)과 검음(黔陰)의 골짜기 사이로 들어가서 덕천벼리로 나오니 소위 두류만학문(頭流萬壑門)이라 일컫는 것이 이것이다.

동천(洞天)이 크게 트여 넓어지고 산수는 아름다워 사방 8~9리는 될 것 같고 시내를 따라 상하 일대의 긴 숲은 모두 복숭아꽃과 철쭉이다. 농사 짓기도 알맞고 고기잡이에도 알맞으며, 누에도 칠 만하고 약초도 캘 만하니 은자들이 거닐 만한 곳이다. 추강 남효온의 유산록에 이르기를, “덕천벼리를 따라 올라가면서 아래로 긴 시내를 내려다보면 시내 양언덕에 가을 산이 끼어 있고 비단으로 수놓은 거울 속에 고기가 나무 위에서 놀고 새가 냇물 아래로 날고 있는 것 같다. 水石이 기이하고 웅장하여 벌써 사람의 눈을 기쁘게 하는데, 그 동네로 들어서면 집집마다 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감과 밤이 붉고 누렇게 익어 의연하기가 무릉도원이나 주진촌(朱陳村 *주씨와 진씨만 살면서 서로 혼인하여 화목하게 살았다는 마을. 백거이의 시)과 같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명종 경신년(1560)에 조남명이 삼가로부터 가족을 이끌고 와 살 곳으로 정하였으니 옛날의 사륜동이다. 시를 지어 말하였다.

 

  偶然居住絲綸洞(우연거주사륜동) 우연히 사륜동에 살면서

  今日方知造物紿(금일방지조물태) 조물주도 속이는 줄 오늘에서야 알았네

  故遣空緘充隱去(고견공함충은거) 일부러 공연한 전갈로 숫자나 채우는 은자로 만들어 놓아

  爲成麻到七番來(위성마도칠번래) 나를 부르는 임금의 사자 일곱 번이나 왔다오. (*남명학연구소 옮김/남명집 참조)

 

  日暮山童荷鋤長(일모산동하서장) 해질녘 산골 아이는 호미를 멘 채 자라는구나

  耘時不問種時忘(운시불문종시망) 김맬 때는 물론이고 씨뿌린 때도 잊어버릴 정도로.

  五更鶴唳驚殘夢(오경학려경잔몽) 오경의 학 울음소리에 어렴풋이 꿈을 깨어

  始覺身兼蟻國王(시각신겸의국왕) 비로소 내 몸이 개미나라의 임금을 겸한 것을 알았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마는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다만 옥황상제 사는 곳 가까운 천왕봉을 좋아해서라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猶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 맑은 물 십리나 되니 마시고도 남겠네.

 

삼장리에 장항동이 있으니 谷口가 그윽하고 깊어 삼십여 리나 되고 石泉이 기이하고 험하여 가장 뛰어난 경치로 일컬어진다. 거기 반석은 십여 인이 앉을 만하다. 하수일이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谷口兩崖懸似壁(곡구양애현사벽) 곡구의 양 벼랑은 벽처럼 매달렸고, 澗心雙石矗如盤(간심쌍석촉여반) 물 가운데 한 쌍의 돌은 소반을 쌓은 것 같네”라 한 것이 이것이다. 탑동은 장항동 아래에 있고 관포 어득강(灌圃 魚得江 1470-1550)이 일찍이 여기에 정자를 지었고, 심인대사에게 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三樂薩川舊遊地(삼락살천구유지) 삼락의 살천은 옛날 놀던 곳

  出山還隱十年遅(출산귀은십년지) 산을 나갔다가 돌아와 은거하려니 십년이 늦어졌네

  師今見我還農圃(사금견아환농포) 대사는 지금 나를 보고 농포로 돌아가라 하기에

  急報山庭莫浪移(급보산정막랑이) 급하게 산속에 알려 이문(移文 *산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회람하는 글)을 띄우지 말라 하였네.

 

 

덕천에서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꺾어 장령(獐嶺 *노루목)을 통과하면 대원사에 이른다. 소나무 전나무가 산기슭에 푸르고 큰 바위가 시내 바닥에 평평하게 깔려 있고 물이 돌에 부딪쳐 맑은 종소리가 나고 골짜기는 깊고 고요하다. 위에는 탑전(塔殿)이 있는데, 모두 12층으로 비록 사치스럽거나 크지는 않지만 극히 정교하고 치밀하며, 분칠한 담장을 둘렀고 잔돌을 깔아 침도 뱉지 못할 만큼 깨끗하다. 스님의 말로는, 부처의 이빨을 간직한 곳이라 하고, 벽에 한 척 남짓한 큰 발자국은 부처의 족적이라 한다.

여기서 몇 궁(弓 *弓은 거리의 단위)쯤 거리에 용추가 있고 계곡과 거석이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하며, 완만한 곳은 물살이 두루 퍼져 주렴을 내린 듯하고 물살이 급한 곳은 물이 모여 폭포가 되었다. 큰 웅덩이 작은 웅덩이가 있고, 웅덩이마다 물이 흥건히 괴어 있는데, 깊은 것은 어지러워 내려다볼 수가 없고 얕은 것은 남청색으로 검푸르러 신령한 동물이 숨어 있는 듯,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또 돌항아리가 있는데 큰 돌에 3개의 구멍이 곧게 뚫린 것이며 입구는 좁고 가운데는 넓어 몇 석의 곡식을 채울 수 있을 정도이며 절의 스님들이 채소를 담가 두는데 봄 여름을 지나도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맨꼭대기까지 아직 60여 리나 남았는데 산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절에서부터 비용과 식량 및 도구를 준비하고 행장을 꾸려 덮개를 덮고 앞에서 이끄는 길을 잘 아는 스님 약간 명이 있어야 감히 나아갈 수 있다. 십여 리를 가면 산골짜기가 조금 넓어지고 모옥 수십 채가 촌락을 이루었는데 소마굿간과 돼지우리가 비좁게 자리잡고 있으며 아이의 울음소리와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아래 세상과 완연히 같다. 유평마을이다. 또 십여 리를 가면 산속으로 계곡이 선처럼 뚫려 있는데 가시나무 가지가 옷을 잡아당기고 바위가 뾰족뾰족 튀어나온 돌산으로 걷기가 극히 곤란하다. 유평에서 이곳까지는 높고 가파른 고개는 없지만 대략 한 걸음이 앞의 한 걸음보다 높고 한 걸음이 앞의 한 걸음보다 험하다. 시내를 따라 암벽을 부여잡고 올라 십리를 가면 애전령(艾田嶺 *쑥밭재)이고 고개 밖은 호남 땅이다.

또 십리 남짓 나아가 높은 고개를 넘고 벼랑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산을 오르는 일은 반나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온갖 산마루가 남쪽으로 흐르는 것을 내려다보니 뭇 산들이 일대에서 웅장하게 서 서 모두 얼굴빛을 바로하고 숨을 죽이고 몸을 구부려 마치 뭇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처럼 공손한 모습을 하고 있다. 때때로 내리는 비와 흩어지는 구름은 산허리에서 일어났다 스러지곤 한다. 큰 바위가 깎아지른 듯 천 척이나 솟고 아랫쪽 나무등걸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곳이 개운암(開雲岩)이다. 오리를 가서 중봉에 이르면 몸은 이미 반쯤 하늘에 있는 듯하고 하늘의 세찬 바람이 귀밑머리를 날린다. 숲속의 나무는 모두 옹이가 있는 떡갈나무인데 지름 한 자가 되는 것은 흔하고 명령(冥靈 *5백년을 봄으로 삼고 5백년을 가을로 삼는다는 신화 속의 나무)처럼 오래 산 나무들도 있다.

낙엽이 정강이까지 빠져 더디게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겨야 하니 극히 힘들다. 중간에 반드시 숙박을 해야 하고 개미처럼 붙어 올라야 한다. 산꼭대기는 대머리처럼 초목이 전혀 없고, 무더기로 자라는 가늘고 솜털 같은 풀들은 모두가 쇠잔하고 문드러져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사모(紗帽 *벼슬아치의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것 같다. 돌 표면은 햇볕에 타서 하얗게 바래 태초의 눈을 두른 것 같고, 강한 바람이 등을 떠밀어 양 소매를 신선이 될 것처럼 들어올린다. 눈 아래로 펼쳐진 뭇 산들은 언뜻언뜻 깎여서 엎드린 것이 언덕 같고 볼록한 흙덩이 같고 작은 돌 같고 만두 같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경관이 달라진다. 여기가 곧 천왕봉이다. 만성 박치복(1824-1893)의 유산기에 “극히 높은 곳에 이르니 털끝에서 촌척을 가지고 다투는 형세였다. 홀연히 바위를 돌아가니 길이 다하여 아쉽지만 멈추었고, 눈앞에서 헛꽃이 떨어져 내리고 뇌수가 어질어질 돌고 마침내 다리를 바늘로 찌르는 듯하여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내가 이미 천왕봉에 올랐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겠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여기에 이른 자는 반드시 머물러 자고 돌아가야 하므로 정상에는 담장, 솥 거는 곳, 화톳불 피우는 자리가 많다. 한여름에도 한기가 뼈에 스며들어 술을 마시지 않거나 목탄을 태우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므로 정상의 나무는 제 수명을 보전하는 것이 드물다. 옛날 호남사람 13인이 비를 만나 이곳에서 목숨을 같이 하였다 하니 지리산이 금강산에 비할 수 없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러나 금강산의 비로봉과 지리산의 천왕봉이 모두 높고 크다고 칭해지나 내가 들은 바로는 지리산이 금강산보다 100장(丈)이 높다 하고 그 아래에 일세를 울린 고인과 유명한 승려가 많이 나왔다. 장차 지리산 전체를 다음 호에 실으려 한다.

 

 

천왕봉 정상은 넓어서 백여 인이 앉을 만하며 낮은 담장이 둘러쌌는데 감사 윤광안이 쌓은 것이다. 아래에는 이름을 쓴 바위가 있는데 고인이 새긴 이름이 많이 닿아 없어졌다. 또 성모사가 있고 소상(塑像 *흙으로 빚은 像)에 제사를 지낸다. 점필재 김문간공의 두류록에 이르기를, 「“성모는 어떤 신인가?” 물으니 승려 해공이 대답하기를 “석가의 모친 마야부인입니다.” 하였다. 아, 이럴 수가 있는가? 서천축과 우리나라는 천백 세계나 떨어져 있거늘 마야국의 부인이 어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보니 “성모가 도선국사에게 명하였다.” 하고서 그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의 지리산 천왕이다” 하였으니 바로 고려태조의 모친 위숙왕후이다.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에 관한 설화를 익히 듣고서 그들 임금의 계보를 신격화하고자 이 이야기를 지어냈거늘 이승휴가 그것을 믿고서 제왕운기에 기록한 것이니, 이를 변별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탁영 김일손은 유산록에서 「내가 사당에 고하려고 제문이 이미 이루어져 장차 술을 부으려고 할 때 정백욱(白勗은 일두선생 여창의 字)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시방 마야부인이라고 하는데 그대가 위숙왕후라고 밝히니 세인들의 의혹을 면치 못할 것이네. 그만두는 것만 못하네.” 하였다. 내가 “위숙왕후든 마야부인이든 차치하고 산신령에게 술을 부을 수는 있겠지.” 하자 백욱은 “일찌기 공자께서 '태산이 임방만 못하겠는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기에 마침내 그만두었다.」 하였다.

또 조남명 선생은 두류록에서 말하였다.(*남명선생의 기록이 아니라 성여신의 기록이다. [부사집(浮査集)]) 「승려 천연은 관서의 시를 잘 짓는 중이다. 용력이 절륜하고 시의 격조가 맑고 깨끗하였다. 묘향산으로부터 와서 두류산 천만 골짜기를 두루 구경하고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에 성모사가 있거늘 신상을 때려부숴 바위 아래에 던지고 가버렸다. 그 얘기를 내가 듣고는 장하다고 여겼다. 그후에 내가 두셋 동지들과 함께 고을 남쪽 천동암의 절간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어떤 중이 대삿갓을 쓰고 철쭉장을 짚고서 큰소리로 잠깐 예를 표하고는 “객승이 왔습니다.” 하였다. 다른 사람은 적승(賊僧 *도적 같은 중)이 아닌가 두려워 말을 못하기에, 내가 “스님은 어디에서 왔소?”하고 물었더니 “두류산에서 왔습니다.” 하였다. 다시 “두류산 어느 동에서 왔소?”하고 묻자 중은 “두류산 덕산동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묻기를 “덕산에서 누구를 보았소?”하니 “남명선생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물러나 손군 밀과 하호원 등과 대화하며 수일 동안 머물다가 왔습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소매 속에서 시 한 축을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그 시축을 보니 손‧하와 더불어 주고받은 것이 많고 중의 시도 골격이 있었다. 나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 이름을 물었더니 천연(天然)이라 하였다. “내가 일찍이 듣기를 그대가 용감한 일을 한 사람인가?”하였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그대가 그런 일을 한 까닭은 무엇인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두류산은 방장산이고, 방장산은 천하의 명산으로, 뭇 신선이 노니는 곳이고 불보살이 사는 곳이거늘 무당의 무리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인하여 떼지어 모여 명산을 짓밟아 더럽히니 분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곧바로 문 밖에 이르러 그 안을 엿보니 호랑이가 그 안에 가득한지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닫힌 문 안에 어찌 호랑이가 생겨날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한소리 길게 외치면서 문을 밀치고 돌진해 들어가 앞에 보이는 것을 보니 호랑이가 아니고 깃발(幢幡)들이었습니다. 신상을 뽑아서 때려부숴 바위 아래로 던져버렸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어 신상이 있던 자리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동해 일출을 구경하고 산 서쪽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신고 있는 가죽신이 다 헤어졌는지라 깃발을 찢어 신발을 만들어 신고 남쪽으로 내려와 의신사에서 묵었습니다.”」

그후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신상을 다시 만들어 삿된 제사가 처음과 같았다. 그 동쪽에 향적사가 있는데 성모사의 향화를 위하여 세운 것이다. 아래에는 법계사가 있고 세 석불이 있는데 기도하며 제사지내는 자가 끊이지 않는다. 서쪽으로 수십 보에 문창대가 있는데 최고운이 소요하던 곳이고, 그 북쪽에 석봉이 돌출하였는데 이름하여 세존봉이다. 기림사 ○경대 무위암 남대암이 그 근방에 있었는데 어떤 것은 없어지고 어떤 것은 남아 있다.

 

 

허미수는 지리산기에서 "천왕봉은 일만사천丈 높이로 꼭대기는 매우 추워서 산의 나무들이 크게 자라지 못하고 팔월에도 눈이 내린다. 거기서 바라보면 동쪽 끝이 해 뜨는 곳이고, 근해에는 검매도 욕지도 절영도가 보인다. 그 바깥은 대마도로 일본이고, 그 서쪽은 연(燕)‧제(齊)의 바다로 천리 밖은 중국대륙이다. 남쪽 끝은 탐라이고 그 밖은 안력이 미치지 않는다." 하였다.

박만성은 유산록에서 말하였다. 「밤 동안 꼭대기에 올랐는데 대지는 침침하고 모든 것이 어둑어둑한데 붉은 빛을 띤 곳이 동쪽임을 알았다. 찬란한 황금빛이 온 땅을 물들여 아주 작은 것도 비추지 않는 것이 없어, 하늘 끝과 바다 끝처럼 먼 곳이나 언덕과 들판 습지처럼 미세한 것까지 똑똑히 셀 수 있었다.

잠시 후 홍색이 짙어 적색이 되고 적색이 변하여 자색이 되었는데, 밝게 빛나 일렁거리는 그 모습은 뭐라 이름 붙일 수가 없었다. 나머지 햇무리가 동쪽에서 북쪽으로 또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쳤다가 이 둘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점점 길어져 서로 합쳐 고리처럼 뭉쳤고 그 아래에는 하얀 기운이 다시 고리처럼 둘러쌌다. 상서로운 구름과 상서로운 아지랑이가 둥글게 뒤섞여 흔들리는데, 가로지른 것은 길이 뚫린 것 같고, 서 있는 것은 대장기를 세운 듯하고, 혹은 일산처럼 바람에 나부끼기도 하고, 혹은 천막처럼 둘러싸기도 하였다. 은대와 금궁궐이 술잔의 모서리처럼 빽빽하게 겹쳐 있고 천자의 깃발이 수레에 꽂혀 호위하는 것처럼 죽 늘어서서 한곳으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조금 있다가 하나의 횃불이 먼저 떠오르자 만 개의 횃불이 이어서 불붙어 이글이글 환하게 빛나니, 나란히 불의 성이 되었다가 불의 성 가운대가 갈라져 둥근 바퀴가 나왔다. 아래에는 은쟁반이 떠받치고 있었는데 서늘하고 깨끗하여 광채가 없는 듯하였다. 그 몸체는 학의 머리마냥 길었는데 돌미륵이나 부도탑이 점차 평평하게 낮아져 와불이나 가로누운 배처럼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합쳐져 독이나 술단지나 발우나 징이나 북의 모양이 되었는데, 네모지거나 둥근 것이 일정치 않았으며 길이와 너비가 서로 바뀌기도 하여 한 순간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해가 한 자쯤 바다 위로 떠오르자 주변의 대기가 점점 엷어지고 불빛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밝고 환한 태양이 뚜렷이 동쪽 하늘에 떠서 아침 햇살이 온 땅에 가득하였다. 문득 등 뒤를 돌아보니 큰 그림자가 온 대지를 삼분의 일이나 뒤덮고 뾰족하게 위로 솟아 곧장 서쪽 하늘 끝까지 다다른 것은 산의 형세요, 그 꼭대기에 나무처럼 빽빽하게 서 있는 것은 사람의 그림자였다.

내가 생각하기를 ‘우리가 티끌세상에 붙어살면서 구부정하게 무리지어 움직이고 절뚝거리며 가는 것이 느릅나무 사이로 날아다니는 메추라기나 우물 속의 개구리와 별 차이가 없다. 지금 홀연히 몸을 빼어 만 길이나 되는 꼭대기에 곧바로 올라 온갖 것들의 밖에 홀로 서서 하늘과 땅 사이에 떠다니니 참으로 신기하다. 지금 또 몇 만 리 밖을 마음대로 내달려 여농산(麗農山 *도교의 5신산 중의 하나. 서쪽에 위치)을 넘고 구라파를 지나 약목(若木 *동쪽 바다 속 해뜨는 나무 扶桑부상)의 그늘에서 거닐며 쉬고, 우연(虞淵 *서쪽 해가 지는 연못 咸池)에서 씻어 깨끗이 한다면 내가 열자(列子)가 바람을 타고 놀았다거나 장건이 세상의 끝까지 갔다는 것은 모르지만, 아마도 이와 비슷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향적사로부터 서쪽으로 오십 리를 내려가면 가섭대가 있고 대 남쪽에 영신사가 있다. 또 서쪽으로 이십여 리를 내려가면 텅 비어 있는 넓은 땅이 있는데 평평하고 비옥하며 가로세로 모두 육칠리로 왕왕 아래가 습하여 곡식을 심기에 적합하다. 오래된 잣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낙엽이 정강이까지 빠지며 가운데는 비어 있고 사방을 돌아보면 끝이 없어 완전한 하나의 평야이다. 비스듬히 시내를 따라 남하하면 의신·신흥·쌍계 삼사가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어 이십여 리에 칠불사가 있다. 물은 영신사의 작은 샘에서 시작되어 신흥사 앞에 이르러 큰 내가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니 이것이 바로 화개동천이다.

천불암에서 북쪽으로 조금 오르면 작은 굴이 있어 동쪽으로 큰 바다를 향하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는데 바위를 법주굴이라 부른다. 또 물은 두 갈래가 있고 빙설은 여름이 지나도 녹지 않으며 유월에 서리가 시작되고 칠월에 눈이 시작되며 팔월에 큰 얼음이 언다. 거의 겨울 초가 되면 눈이 깊어 계곡은 모두 갇히게 되어 사람들은 왕래할 수 없으므로 산에 사는 사람들은 가을에 들어가면 다음해 봄 늦게야 내려온다. 혹 산 아래에 크게 뇌성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도 산 위에는 맑고 구름 한 점 없기도 하다.

     

쌍계사는 화개동에 있으니 신라 최치원이 책 읽던 곳이다. 뜰에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어 크기가 수백 아름이요,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개울을 건너 서리서리 얽힌 것이 다리를 놓은 듯해 절의 중들이 다리로 삼아 건너다니니 세상에 전하기를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절 뒤쪽에 동서로 방장(*고승의 거처)이 있으니 곧 그가 독서하던 곳이다. 고운은 일찍이 “호원상인에게 주다[寄顥源上人]”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終日低頭弄筆端(종일저두농필단) 종일토록 머리 숙이고 붓끝만 희롱하니

  人人杜口話心難(인인두구화심란) 사람마다 입 다물어 속맘 말하기 어렵구나

  遠離塵世雖堪喜(원리진세수감희) 티끌세상 멀리 떠나 물론 즐겁지만

  爭奈風情未肯闌(쟁내풍정미긍한) 풍정의 미련은 못 버릴 테니 이를 어찌하리

  影鬪晴霞紅葉逕(영투청하홍엽경) 맑은 노을에 단풍 그림자 길에 어리고

  聲連夜雨白雲湍(성련야우백운단) 밤비 소리 흰 구름 비친 여울까지 이어지네

  吟魂對景無羈絆(음혼대경무기반) 시인의 영혼은 경치를 대하여 걷잡을 수 없는데

  四海深機憶道安(사해심기억도안) 사해의 깊은 기심에 도안을 생각노라 (*진나라 문인 습착치와 고승 도안의 고사를 끌어와 자신과 호원상인이 儒佛을 떠나 마음으로 교유하고 싶다는 뜻)

 

절 동쪽은 비전(碑殿)으로 고운이 짓고 글씨까지 쓴 진감의 비가 있으니 당(唐) 희종 광계3년(887)이다. 비 앞에는 팔영루가 있고 관포 어득강(1470-1550)의 팔영루 시가 현판에 걸려 있고, 골짜기 입구 수 里쯤에 2개의 큰 돌이 문처럼 마주 서 있는데 고운이 쌍계석문 네 글자를 썼다. 획의 크기가 사슴 정강이뼈 만하다. 눌재 박상(1474-1530)은 시에서 이렇게 읆었다.

  方丈三韓聞天下(방장삼한문천하) 삼한의 방장산은 천하에 소문났지만

  雙溪形勝又無多(쌍계형승우무다) 쌍계 같은 절경은 많지 않을 것이로다

  鶴洞層波驚霹靂(학동청파경벽력) 청학동의 층층이 떨어지는 물결 우레처럼 놀랍고

  石門四字舞蛟龜(석문사자무교구) 석문의 네 글자는 교룡과 거북이 춤추는 듯하네.

 

또 감사 장만(1566-1629)의 시는 이러하다.

  山靈嫌我俗塵來(산령혐아속진래) 산신령은 속세에 찌든 내가 오는 것을 싫어하여

  故遣霏微鬱不開(고견비미울불개) 부슬비를 계속 내려 날이 개이지 않게 하네

  未見頭流眞面目(미견두류진면목) 두류산 진면목은 보지 못하고

  石面斜日帶愁歸(석면사일대수귀) 바윗돌에 석양 비껴 수심 안고 돌아오네.

 

또 부사 성여신이 지은 책(*진양지)에 말하기를, “절의 처음 이름은 옥천사이니 고운이 진감과 도우(道友)가 되어 고운은 동쪽에 거처하고 진감은 서쪽에 거처할 때 삼신동과 청학동의 양 계류가 절 앞을 흐르는 것을 보고 '쌍계석문' 네 글자를 크게 썼더니 후에 절을 지을 때 쌍계로 이름을 삼았다.”고 하였다. 또 말하였다. 「승려 중섬이 말하기를 “하루는 청학동의 하류에서 노는데 대나무껍질이 떠내려 오기에 거두어서 봤더니 죽순의 껍질이 벗겨진 것으로 길이가 1척 남짓이라, 괴이하게 여겨 그 근원을 찾아 종일토록 찾아 헤맸으나 죽림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하였으니, 그 위에 하나의 비밀스런 구역이 있어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 아니겠는가? 그 동쪽에는 옛날에 불출사(佛出寺)와 영대(靈臺)·도솔(兜率)·옥수(玉水)·보문(寶文 *普門의 착오인 듯)·남대(南臺) 등의 여러 암자가 있었고, 북쪽에는 소은(小隱)·고령(古靈)·지장(地藏)의 여러 암자가 있었다. 불일암은 청학동 위에 있고 서쪽으로 쌍계사와 십여 리 떨어져 있으며, 낭떠러지 끝이 몹시 험준하여 계곡가에 길을 낼 데가 없어 절벽의 허리를 뚫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고 낭떠러지가 끊어진 곳에는 나무를 걸쳐 잔교를 놓은 것이 여러 곳이요, 그 아래는 깊어 바닥이 보이지 않으니 왕래하는 자들은 땀이 흐르고 머리가 곤두서지 않는 경우가 없다.  

암자는 수백 장 벼랑 끝에 위치해 있고, 동쪽에는 비폭(飛瀑)이 떨어져내려 2개의 못을 만들었으니 용추와 학연이다. 암자 앞에 고송이 있는데 천 길이나 되고 석면에 완폭대 세 글자가 있다. 대의 남쪽 절벽 건너편에 향로봉이 있는데 뾰족하게 홀로 서 있고 봉우리 서편은 깎아지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된다. 청학 한 쌍이 그 사이에 살았는데 일찍이 어떤 미친 사내가 돌을 던져 학의 날개를 부러뜨려 부러진 날개로 날아가버렸으니 이로부터 학이 없어졌다 한다.」

조남명은 두류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소위 불일암이라는 곳이 곧 청학동이다. 바위가 허공에 매달린 듯한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동쪽에 높고 가파르게 떠받치듯 솟은 것이 향로봉이고, 서쪽에 절벽을 깎은 듯한 푸른 벼량은 비로봉이다. 청학 두세 마리가 그 바위틈에 깃들어 살면서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기도 하고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려오기도 한다. 아래에는 학연이 있는데 까마득하여 밑이 보이질 않았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에 빙 둘러 있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문득 소용돌이치며 쏜살같이 쏟아져내리다가 문득 합치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수초가 우거지고 초목이 무성하여 물고기나 새도 오르내릴 수 없었다. 그 안에 신선, 거령, 큰 교룡, 작은 거북 등이 숨어 살면서 영원히 이곳을 지키며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들어 놓아서, 겨우 그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를 걷어내고 벽면을 살펴보니 ‘삼선동’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어느 때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고려의 이인로는 그의 문집에서 말하였다. 「지리산은 백두산에서 일어나 시작되어,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이 이어져 대방군에 이르러 수천 리를 내려온 것이 서리어 맺혔다. 주위에는 10여 고을이 있는데, 한 달은 걸려야 그 끝까지 다 돌아볼 수 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이 산 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 사람이 겨우 통행할 수 있다. 구부리고 엎드려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동네가 나타나는데, 사방이 모두 좋은 땅으로 비옥하여 곡식을 심기에 알맞다. 오직 청학이 그 안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청학동이라고 이름하였다 한다. 대개 옛날에 세상을 피한 사람들이 살던 곳인데, 무너진 담장과 집터가 아직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예전에 최상국(崔相國) 모(某)와 함께 옷을 떨치고 멀리 떠날 뜻이 있어 이 골짜기를 찾아가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장차 대바구니를 두세 마리 소에 싣고 들어가면 속세와 멀어질 수 있으리라 여겨 화암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묵었는데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곳이 없었다. 천 봉우리는 빼어남을 자랑하고 만 골짜기는 다투듯 흘렀으며, 대울타리 안의 모옥에는 복사꽃이 뒤덮여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청학동은 끝내 찾을 수 없었고, 그리하여 시를 지어 바위에 남겼다.

  頭流山逈暮雲低(두류산형모운저)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 구름 낮게 깔려

  萬壑千巖似會稽(만학천암사회계)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 회계산과 같네.  

  杖策欲尋靑鶴洞(책장욕심청학동)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을 찾고자 하나

  隔林空聽白猿啼(격림공청백원제)  숲 속에선 부질없이 잔나비 울음소리 뿐.  

  樓臺縹緲三山遠(누대표묘삼산원)  누대(樓臺)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리 있고,   

  苔蘚微茫四字題(태소미망사자제)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試問仙源何處是(시문선원하처시)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어디인가?

  落花流水使人迷(낙화유수사인미)  지는 꽃잎 흐르는 물에 길을 잃었네.」

 

보조암(普照庵)은 불일암의 북쪽에 있고 칠불암은 삼신동에 있는데 옛날엔 운상원(雲上院)이라 하였고 일명 금륜사(金輪寺)라고 하였으니 옛날 옥부선인이 이곳에 은거하여 옥피리를 불 적에 신라왕자 7인이 선인을 따라 놀았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아(亞)자방이 있는데 큰 실(室)의 형태가 아자 모양 같고, 그 아자의 볼록하게 솟아나온 부분 위가 모두 1칸의 방이 되었고 그 사이 빈칸 또한 방이 되었다. 한 달에 다만 세 번 불을 붙이는데 불을 땔 적에는 나뭇꾼이 지고 온 땔감을 아궁이에 넣고 온돌 안쪽에 땔나무를 쌓고 불을 붙이면 열흘이 지나도 방구들이 여전히 따듯하다. 수리하여 고칠 땐 집 뒤의 굴뚝 속으로 수십 항아리의 물을 부어 물이 아궁이로 나오게 하여 연기와 그을음을 완전히 씻어내고는 멈춘다. 전해 오기를, 구들이 처음 만들어진 이후 지금까지 1000여 년이 지났지만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통일(通日)·금사(金沙)·청사(靑紗)의 여러 암자가 그 북쪽에 있고 신흥사는 칠불암 위에 있으며 수각(水閣)이 절벽 위를 가로질러 있으니 이름은 수홍교(垂虹橋)이다. 서산휴정은 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다.

  畫閣飛雲橋臥水(화각비운교와수) 그림 같은 누각에 구름 날고 다리는 물 위에 누웠는데

  山僧每日踐長虹(산승매일천장홍) 산승은 매일 긴 무지개를 밟는다

  幾多塵世翻新局(기다진세번신국) 티끌세상은 새판을 뒤집는 일 얼마나 많았던가

  何代閑民作老翁(하대한민작노옹) 어느덧 한가로운 백성은 늙어버렸네

  春暮仙間花雨亂(춘모선간화우란) 선경에 봄 저무니 꽃비 어지럽게 내리고

  月明天上玉樓空(월명천상옥루공) 하늘의 달 밝은데 옥 같은 누각은 비었구나

  澗琴松瑟無終曲(간금송슬무종곡) 산골물은 거문고 되고 소나무는 비파 되어 끝없이 노래하니

  萬古乾坤一笑中(만고건곤일소중) 만고의 천지가 한 웃음 속에 있도다

 

수각으로부터 수백 보 거리에 능파각(凌波閣)이 있고 누각 아래 시내 가운데 너럭바위가 있어 수십 인이 앉을 수 있으며 세이암(洗耳岩)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매양 새롭게 양쪽의 물이 불어나면 돌에 부딪쳐 폭포를 내뿜고 만 개의 구슬을 빨아들이고 내뿜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혹은 휘돌아 깊은 못이 되니 시퍼렇고 검푸르러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흘러 쌍계천이 된다. 사당암(社棠庵)은 서쪽에 있는데 큰 돌이 평평하게 깔려 있고 옛날에는 돌 곁에 동백나무가 있어 눈 속에 붉은 꽃이 풍성하게 피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큰 대나무가 무성하여 빼어난데 달밤이면 푸른 그림자가 일렁인다. 그 북쪽에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암자가 있고 또 의신사가 있는데 유영순(1552-1630)의 시는 이렇다.

  列岳如諸弟(열악여제제)  벌여 선 산들은 아우와 같고

  天王集大成(천왕집대성)  천왕봉은 그 모든 것이 모여 우뚝하구나

  雪霜松檜老(설상송회로)  눈 서리 맞은 소나무 전나무는 늙었고

  岩壑薜蘿縈(암학벽라영)  바위 골짜기 덩굴나무는 얽혀 있네

  危石風疑墜(위석풍의추)  위태로운 돌은 바람에 굴러 떨어질 것 같고

  寒花春不英(환화춘불영)  추위에 꽃은 봄이 되어도 봉오리를 맺지 않네

  扶笻下鳥道(부공하조도)  지팡이 짚고 험한 길 내려오니

  步步白雲生(보보백운생)  걸음마다 흰 구름 피어나네.

 

영신암은 그 위에 있고 그외 여러 암자와 대(臺)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상 쌍계·칠불·삼신의 여러 절은 모두 하동 화개현과 호남 구례의 경계에 있고, 화개동천이 용왕연(龍王淵)이 되고 섬진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니 그곳은 광양군과의 경계지역이다.

 

 

악양의 옛 고을은 화개 동쪽에 있으니 너른 들판 가운데 외따로 산이 있는 것이 중국 악양의 군산(群山)과 같고 서쪽에 있는 섬호(蟾湖)는 동정호와 같으며 북쪽의 높은 언덕은 파릉(巴陵)과 경치가 비견되므로 악양이 유명한 것은 이 때문인가? 강에는 큰 물이 넘쳐 풍속이 배의 편리함을 숭상한다. 그 동쪽은 진답 선천 전두 오대 등촌이고 전두에는 청암천이 있어 계곡과 산은 깊고 그윽하며 폭포는 비단을 펼친 듯하다. 그 가운데는 괴석이 많고 상수리나무 닥나무 단풍나무 감나무와 죽림이 우거져 푸르다. 동쪽에는 용유동이 있으니 조남명의 “용유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다.”는 말이 이것이다.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가면 오봉이 대처럼 벌려 서 있으므로 오대라 하며 수정사(水精寺)가 있고 수정주(水精珠)를 간직하였는데 고니의 알 같아 여의주라 칭하였고 은실에 묶어 구경거리로 전하며 보배로 삼았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일찍이 대각국사가 남녘을 유람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산수가 매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시주를 모아 처음 이 절을 지었으니 집이 모두 86칸이었다. 수정주를 얻어 무량수불 상(像)에 걸어놓고 밝은 신표로 삼았다. 고려 인종 원년 계묘(1123)에 시작하여 7년 만인 기유(1129)에 준공하여 낙성법회를 열었는데 왕이 안찰부사 윤언이에게 명하여 분향케 하고 은 2백 냥을 하사하였다.” 한다.

그 동북에 안양사가 있어 오대사와 함께 승경으로 일컬어지더니 지금은 폐해졌고 절에서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40여 리를 가면 계곡이 험하고 끊어진 곳에 과거 묵계사가 있었다 한다. 그 북쪽으로 높은 고개를 넘으면 살천부곡이니 지금의 산청 끝자락이다. 향적·법계 2곳에서 발원한 물은 여기에서 합쳐지고 소남진(召南津)으로 흘러 들어가 진주에 이르러 청천강(菁川江)이 된다. 살천으로부터 20여 리를 가면 ㅇ보암이라 그 살천 이내는 내산(內山)이라 하고 이외는 외산(外山)이라 이른다.

단속사는 살천과 남사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으니 신라 고찰이다. 동구에는 ‘광제암문(廣濟岩門)’ 네 글자를 최고운이 써서 새겼다고 하나 실제로는 고운의 글씨가 아니다. 또 신라 병부령 김헌정이 지은 신행(神行)대사의 비명(碑銘)이 있으니 그 글씨는 승려 영업이 쓴 것으로 획이 철사줄 같고, 또 고려 평장사 이지무가 지은 승려 대감의 비명과 김은주가 지은 진정대사의 비명이 있다. 사지(寺誌)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22년(763) 대내마(大奈麻) 이순(李純)이 왕의 총애를 입다가 하루아침에 벼슬을 버리고 중이 되어 이 절을 창건하고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다가 임금의 실정(失政)을 듣고는 문득 궁문에 나아가 간하니 왕이 듣고는 침실로 이끌어 여러 날을 강론하였다.”고 하였다. 강통정 회백이 벼슬에 나아가기 전 이 절에서 독서했다 하며, 매화나무가 무더기로 자라는데 매화 한 그루를 손수 심었더니 후에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정당매라 불렀다 하니 매화나무가 총총이 나서 아직까지 남아 있다. 정당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遇然還訪故山來(우연환방고산래) 우연히 옛 고향을 다시 찾아 왔더니

  滿院淸香一樹梅(만원청향일수매) 한그루 맑은 매화향 절에 가득하네

  物性也能知舊主(물성야능지구주) 나무가 능히 옛 주인을 알아보고

  慇懃更向雪中開(은근갱향설중개) 은근히 나를 향해 눈 속에서 피었구나.

그 후에 조남명이 시를 지어 말하였다.

  寺破僧羸山不古(사파승영산불고) 절은 무너지고 스님은 여위었고 산도 옛날 같지 않은데

  前王自是未堪家(전왕자시미감가) 전왕조의 임금은 집안 단속 잘못했다네

  化工正誤寒梅事(화공정오한매사) 조물주가 추위 속 매화의 일을 정녕 그르쳤나니

  昨日開花今日花(작일개화금일화) 어제도 꽃 피우고 오늘도 꽃 피웠구나.(*강회백이 절조를 지키지 못하고 고려 조선 두 왕조에 벼슬한 것을 남명이 비판한 듯)

김탁영의 정당매에 관한 기록도 있으나 다 기록하지는 못한다. 인조(*선조의 오류인 듯) 무진(1568) 겨울에 모여 공부하던 유생들이 절의 불상을 부수고 경판을 불질러 지금 절은 폐해지고 오직 탑과 비와 매화만 남았다.

 

 

미수 허문정은 함양에서부터 유람했으므로 반야봉에 오르고 천왕에 올랐으며 반야와 천왕의 거리는 100여 리이다. 그 유산기에 이르기를, “백장사 남쪽의 군자사는 지리산 북쪽 기슭의 오래된 절이다. 그 아래 용유담은 가뭄에 희생을 바치는 곳이며, 그 물은 반야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흘러 임계(臨溪)가 되고 또 다시 동으로 흘러 용유담이 된다. 깊은 골짜기는 너럭바위라 양쪽 벼랑의 돌 위로 물이 흘러 돌 구덩이, 돌 구멍, 돌 웅덩이가 있고 마치 교룡(蛟龍)이 꿈틀거리는고 규룡(虯龍)이 서려있는 듯한 온갖 기이한 형상이다. 물은 깊어 검게 보이는데, 용솟음치거나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빙빙 돌거나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기도 하며,깊은 물길이 1리나 뻗어 있다. 그 아래에는 긴 여울이 또 1리 남짓 되는데, 수잔뢰(水潺瀨)라 하며, 동쪽으로 흘러 마천의 엄뢰(嚴瀨)가 된다.”고 하였다.

지리산 북쪽 기슭을 따라 유람하는 자는 마천을 거쳐 오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기록이 위와 같다. 용유담은 지리산 북쪽의 물이요, 임천의 하류이니 용유담 곁에는 암석이 평평하게 포개어 쌓였거나 길게 가로질러 기운 것 등 천만 가지 기괴한 모습은 신과 부처가 만든 것 같다. 용유담에는 고기가 있는데 무늬가 가사를 닮아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토박이들이 말하길, “지리산 서북의 저연(猪淵)에서 많이 나는 고기로, 매년 가을 물을 따라 여기에 내려왔다가 봄이면 반드시 저연으로 돌아가므로 엄천 이하는 이 고기가 없다.” 한다.

그 위에 마적(馬跡)·안국(安國)·등구(登龜)의 여러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영원사 한 사찰만 있으니 산 북쪽에서 제일 이름난 가람으로, 수석이 매우 그윽하고 깊숙이 자리하여 쌍계사·칠불암과 경치를 다툰다.

무주암은 고려 승려 무기(無己)가 은거하여 누더기 한 벌로 30년을 지내며 겨울과 여름에는 출입하지 않고 뱃가죽을 말아서 허리끈에 묶었다. 봄·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였다. 하루에 3~4말을 먹었고, 앉으면 반드시 열흘을 보냈으며, 일어나 걸을 땐 낭랑하게 게송(偈頌)을 지어 읊었는데 게송은 다음과 같다.

  此境本無住(차경본무주) 이 경계는 본시 머물 수 없나니

  何人起此堂(하인기차당) 그 누가 이곳에 머물 집을 세웠나

  唯餘無己者(유여무기자) 오직 자기를 버린 자만이

  去住兩無妨(거주양무방) 가고 머무는 것에 걸리지 않네

그 서쪽에 화엄사가 있으니 남원의 경계지역이다. 신라 승려 연기가 창건하였다. 흙을 바르지 않고 사방 벽이 모두 푸른 벽돌인 전각이 하나 있는데 벽 전부에 화엄경을 새겼다. 세월이 오래되어 벽돌이 부서지고 글자가 거의 매몰되어 혹 절의 승려가 부서진 벽돌을 간직하여 고적을 증거한다. 절 앞에는 머리에 어미를 이고 있는 석상이 있으니 세상에 전하기를, 연기조사가 어미에게 효도하여 항상 어미를 업고 다녔으므로 절의 승려가 그 상(像)을 만들어 절의 뜰에 세워 기념한 것이라고 한다. 또 일류봉 월류봉의 양 봉우리가 있어 뛰어난 절경으로 반야봉의 두 손자라고 일컬어진다. 또 연곡사가 있고 현각선사 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외에도 고사(古寺)에는 과거에 동불(銅佛)이 있었는데 크기가 35척(尺)이었다.

이것이 지리산 동남북서 대강의 줄거리이다.

고려 김부의(1079-1136 *김부식의 동생)는 다음의 「등지리산(登智異山)/지리산에 올라」 시를 지었다.

  歷險疑登太華峯(역험의등태화봉) 험로를 지나 태화봉 올랐더니

  歸途還怯夕陽紅(귀도환겁석양홍) 돌아올 땐 도리어 저녁 놀이 겁나네

  偶因王事遊方外(우인왕사유방외) 우연히 나랏일로 방외에 노니나니

  還愧當年楊次公(환괴당년양차공) 도리어 부끄럽구나 당년의 양차공(*宋나라 양걸. 고려 의천스님과 교유하였음)에게.

김돈중(?~1170 *김부식의 아들)이 이어서 읊었다. (*원제는 '계부(季父)의 지리산 시에 차운하여 짓다[智異山次季父韻]'이다)

  躋攀直上最高峯(제반직상최고봉)  더위잡고 곧바로 최고봉에 올라

  回首塵寰一片紅(회수진환일편홍)  티끌 세상 돌아보니 한 조각 먼지로다

  徙倚烟霞得幽趣(사의연하득유취)  연하 속 거닐며 그윽한 정취 얻었으니

  風流不愧晉羊公(풍류불괴진양공)  풍류는 진양공(*晉나라 양호. 어진 정치와 풍류로 유명)에 부끄럽지 않네

이목은(목은 이색 1328-1396)의 시는 이러하다.

  頭流山最大(두류산최대)  두류산이 나라 안에 가장 커서

  羽客豹皮茵(우개표피인)  선인(仙人)은 표범 가죽 자리 깔고 살며

  木末飛雙脚(목말비쌍각)  나무 끝으로 두 다리가 날아다니고

  雲間出半身(운간출반신)  구름 속에 반신만 내놓았네 

또 고려 승려 정명(靜明/법명은 천인天因 1205-1248)은 詩 「송우인(送友人)/벗을 보내며」에서 이렇게 읊었다.

  聞君直入千峯裏(문군직입천봉리)  그대는 곧 바로 천 봉우리 속에 들어갔다 하니

  知在烟霞第幾重(지화연화제기중)  몇 겹의 연기와 노을 속에 있겠구려

  流水落花迷去路(유수낙화미거로)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간 길 아득하니

  他年何處訪高踪(타년하처방고종)  다른 해 어느 곳에서 그대 자취 찾을고?

이는 한유한을 보내면서 준 시가 아닌가 한다. 고려사에 유한이 대대로 서울에 살았는데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최충헌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고 관직을 파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장차 난이 일어날 것이다.”하고는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종신토록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지금의 사륜동이 바로 그곳이다.  <끝>

2 Comments
해영 2018.07.30 15:27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
요즘 이만한 글을 쓸 사람이 언론계에 있을까?
신문이란 곳에 자기의 이름을 감추고 써 갈기는 짓은 요즘이나 일제 때나 한가지 였습니다.
장지연이란 이름을 드러내 놓고 친일의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호방했던 그의 글을 아는 사람은
그가 부역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한줌도 안되는 시류에 숨었던 잉간들의 행태입니다.
방관 내지 시류를 쫓았던 잉간들이 새 세상을 맞고는 돌을 던지는 꼴들이 우리민족의 비극입니다.
며칠 전에 돌아가신 분이 떠올랐습니다.

장지연선생은 돌아 가실 때 묘비의 직함을 [숭양산인]만 올리라 하셨답니다.
어쩔수 없는? 친일에 술과 비양거림으로 세상과 척지고
산에 의지하며 말년을 보내 셨습니다.

소문에 있던 [지리산록]을 쉽게 풀어주셔서 읽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9번에 나눠 연재한 글이 지리산 전체를 그리셨네요.
일출에 대한 묘사,
곳곳에 배치된 옛선인들의 싯구,

더 대단한 것은 영영 가막눈 그림의 떡을 맛나게 풀어준 엉형님의 탁월한 번역이
짜증나는 오후 더운 월요일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저번 산행에서 글은 남이 읽기 편하고 재밌어야 한다는 엉겅퀴형의 썰에서
문학의 깊이를 새삼 느낍니다.

열번은 숙독해 좋은 글 맘에 박겠습니다.
가객 2018.08.01 08:37  
참 대단한 자료입니다.
언급하신대로 고금의 여러 자료를 취합한 것이지만 비상한 재주가 아니면 아무나 편집할 수 없는 글입니다.
지리산에 대한 견문소양이 없이는 쓸 수도 없는 글로서,
 문맥을 이어가는 작가의 재치와 문끼가 지리산을 이해하기 쉽게 하였기에 몇 번을 숙독하게 하는군요.

 말미를 장식한 김부식일가 및 여러 선인들의 시들이 처음대하는 탓으로 크게 돋보입니다.

四회차 마지막에서 "기림사 ○경대 무위암 남대암"에서...ㅇ경대(순경대順鏡臺 ).

솔직히 이 염천에 읽기도 버거운데...ㅎ. 긴 글 국역하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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