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이사람의 삶] 지리산 자연환경생태보존회 회장 우두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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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8월 20일!







 


“곰이 살아야 사람도 삽니다”


 


지리산은 사연이 많은 산이다. 굴곡 많은 한국 근현대사와 남개발은 지리산에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지리산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온몸을 던지고 있는 곰 지킴이 우두성씨(50). 누구라도 찾아오면 품에 감싸 안아주었던 지리산의 넉넉함을 되살리기 위해 반달가슴곰 방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우씨의 산사랑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전북 남원에서 남쪽으로 난 터널을 지나자 눈앞에 큼지막한 녹색평원이 펼쳐졌다. 주변으로 우람한 산의 연봉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 아래 짙은 초록색을 띤 평온한 들판 구석에 한여름의 태양 아래 잠겨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전남 구례군 구례읍이다.


 


들판 한켠에 위치한 읍내는 한없이 고요하다. 오후 거리는 무엇 하나 움직이는 것이 없어 흡사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먼 길을 달려 구례까지 찾아온 것은 이곳에 머물며 지리산의 야생동물, 특히 반달가슴곰 보호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지리산의 풀 포기 하나, 돌멩이 하나, 들짐승 한 마리라도 가볍게 여기다가는 큰코다친다는 신념으로 보살피고 있는 지리산 자연환경생태보존회(이하 보존회) 회장 우두성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동식물 보호전문 보안관’답게 그의 첫인상은 꽤 날카롭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외모에 숨어있는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는 사물을 꿰뚫는 직관력이 담겨 있는 듯하다.


 


보존회 사무실은 구례읍 봉동리 좁은 도로 한켠의 허름한 집에 자리잡고 있다. 출입문 옆에 걸린 낡은 목간판이 말해주듯 오랜 관록을 자랑하는 사무실에 들어서자 진한 곰팡내가 찾는 이를 질리게 한다. 홀에는 밀렵꾼으로부터 수거한 박제된 수달, 오소리, 너구리 등이 아무렇게나 널려있고 잡다한 자료집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상 위에 쌓여 있다.


 


홀 안쪽에 혹처럼 붙어있는 사무실은 더욱 우중충하다. 아니나 다를까, 벽지가 뜯겨진 벽에는 시커멓게 곰팡이 슬어 있다. 형광등을 켜야만 사방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어두운 방 바닥에는 수십년은 족히 묵었을 듯한 거무튀튀한 비닐 장판이 깔려있어 엉덩이를 내려놓기가 민망할 정도다.


 


그렇지만 이 누추한 사무실에도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다. 컴퓨터 시스템이 서울의 유수 벤처기업 못지않게 차려져 있고, 덜덜거리는 소리를 낼 망정 낡은 에어컨도 돌아가고, 팩스에서는 끊임없이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 이런 곳에서 일하기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냥 해본 질문이 아니다. 며칠 눌러 앉아 있다가는 틀림없이 무슨 병이라도 얻을 것 같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무실을 트집잡기 위해 구례까지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한마디 묻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산속에서 며칠씩 자기도 하는데요.”


우씨가 퉁명스레 내뱉은 첫마디는 ‘별 대수롭지 않은 것까지 신경을 쓴다’는 말투다.


짧고 간결한 대답에서 깐깐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난다.


 


- 그래도 생태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사무실도 좀 안락하게 꾸미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요.


 


“시설이 좋은 사무실을 내주겠다고 제의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이게 훨씬 편합니다. 사무실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사냥꾼에서 동물 지킴이로


 


필자가 그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계기는, 우씨가 방사했던 지리산 반달가슴곰이 행방불명된 지 약 10개월 만인 7월16일 죽은 채 발견된 사건이다. 지난해 9월 지리산 문수리 계곡에 방사한 네 마리 반달가슴곰 중 한 마리는 다시 농장으로 데려와 키우고 있고, 나머지는 여전히 지리산 숲속에서 야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만 한 마리가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 무슨 사연이 숨어있는지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우씨 개인에 대한 호기심도 포함돼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하찮게 느껴지는, 뾰족한 수입이라고는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은 반달곰 보호를 위해 등산화깨나 닳아 없앴다는 그의 열정이 속도감을 강조하는 도시의 삶과는 정반대로 보였던 까닭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할 일이 없으니까 그런 일이라도 한다며 고향땅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을 가질 만도 하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시골 사람들에게 ‘자연생태를 보존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들이밀어 지적 허영심을 뽐내보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도 피어오를 법하다. 어찌 됐건 돈도 안 되는 일에 천직인 양 매달리는 모습에 ‘별종’스런 면모가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수입도 없는 일을 왜 하죠.


 


‘그것 잘 물었다’는 듯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답변을 내놓는다. 이미 그런 질문에는 도가 트기라도 한 듯이.


 


“어릴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다른 애들은 고무줄로 새총이나 만들어 갖고 다니던 중학교(대전 충남중), 고등학교(조대부고) 시절에, 저는 벌써 공기총을 들고 노루나 살쾡이를 잡으러 다니곤 했었죠. 청년시절에는 엽총으로 멧돼지도 잡았어요. 지리산에 한번 들어가면 며칠씩 나오지 않은 때도 부지기수였고요. 그렇게 사냥을 다니다가 산을 느끼고 익히게 됐습니다. 천방지축이 개과천선한 셈이죠.”


 


우회장이 그랬듯 세상도 처음부터 지리산의 넉넉함을 눈여겨보았던 것은 아니다. 지리산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된 것은 환경과 삶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기 시작한 근래의 일이다. 그러자 산은, 사람들과 생명들이 20세기 광기의 시대에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아 좀더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넉넉한 토양을 마련해주기 시작했다고 우회장은 말한다. 생태계가 살아나면서 예전의 지리산이 안고 있던 깊이와 다양성이 알게 모르게 살아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반달가슴곰을 찾아서


 


“지리산은 설악처럼 악산이 아닙니다. 자애롭고 인자한 산이지요. 능선마다 샘물이 나와서 물통을 준비하지 않고도 100리 능선을 타고 갈 수 있어요. 아무라도 포용해주는 넉넉함이 빛나는 산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저는 좋은 취미랍시고 꿩, 노루, 멧돼지 사냥을 하러 다녔으니 철이 없었던 거죠.


 


산을 알면 알수록 생각도 많아지더군요. 그 생각을 실천해볼 요량으로 1996년 7월 보존회를 결성하게 됐습니다. 아다시피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지역이지요. 또 인간의 간섭 없이 자연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유일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특히 반달곰, 사향노루, 담비 등 멸종 위기 동물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반만년 우리 민족과 더불어 살아온 토착 동물들을 보존하는 것은 도로 하나 놓는 일보다 더 큰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냥하던 총을 버리고, 직접 산에 들어가 밀렵구를 제거하거나 야생동물 실태를 조사해 환경부에 보고하는 등 보호대책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죠.”   


 


- 야생 반달가슴곰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직 본 적은 없습니다만 우리는 지리산 반달가슴곰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보호운동을 펴왔습니다. 2000년 11월에는 진주 MBC에서 반달가슴곰을 직접 촬영해 특종 보도하기도 했죠. 사냥 다니던 시절의 경험이나 등반객들의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된 것입니다.


저는 20년 전 구례 장에서 반달가슴곰을 사냥해 잡아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연환경생태보존회를 결성한 회원들이 1996년 9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지리산 반달곰 서식 실태조사에 나선 것도 그런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20~30명씩 교대로 골짜기를 뒤졌죠.”


 


지리산 둘레는 850리, 면적은 약 1억3000여 만평이다. 산 밑에서부터 따지면 1000㎢이고, 해발 700m 이상을 기준으로 삼으면 약 450㎢ 규모다. 이중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는 것은 700m 이상 지역. 이들이 생태계 조사에 임했던 것도 이 700m 이상 지역에서였다. 1억5000만원이 넘었다는 소요비용은 모두 보존회 회원 96명이 갹출했다.


 


“회원 대부분이 구례 읍내를 중심으로 상업이나 농업, 건축 일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간혹 경찰이나 군청 직원 등 공무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소규모 자영업자들이다 보니 살림이 넉넉할 리 없죠. 그렇지만 재정적 어려움은 그리 큰 문제라고 보지 않아요. 저희는 아버지대에 만드신 연하반(烟霞伴) 산악회를 통해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받았습니다. 이심전심으로 선배들의 업적을 방관할 수 없다는 묵시적인 동의가 이루어져서, 아이 도시락 싸줄 능력은 없어도 지리산 생태계 보존을 위한 쌀 가마니는 만들어내는 열정을 갖게 됐습니다. 특별히 애향운동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거룩한 일을 한다고 자부해본 적도 없어요. 다만 고향땅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우회장은 아버지대의 활동에 비하면 자신들의 일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쉽고 편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사실 우회장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아버지 우종수(82)씨를 말하는 것이 순서다. 우회장 본인이 ‘자신의 자연에 대한 생각은 모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잘라 말하기 때문이다.


 


 


대 이은 지리산 사랑


 


우회장의 부친 우종수씨는 지리산 등산로를 최초로 개척한 국내 산악계의 원로다. 너새니얼 호손이 지은 ‘큰바위 얼굴’의 주인공처럼 인자한 품성으로 평생 지리산을 말 없이 지켜온 주인공으로 구례 인근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보존회의 선배모임 격인 연하반 산악회 역시 1955년 당시 구례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우종수씨가 사업을 하던 양한익(지난해 88세로 작고)씨 등과 주축이 되어 결성한 최초의 지리산 산악회다.


 


연하란 산수(山水), 또는 자연을 일컫는 우리의 고어라고 한다. 즉 연하반이라는 이름에는 ‘부귀와 공명을 뜬구름처럼 여기고 속진(俗塵)을 벗어나 한가로운 한 마리 학처럼 도반이 되어 살자’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 1955년 5월5일 발표된 구례 연하반 명의의 반지(伴旨·취지문)는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말하는 우두성 회장의 생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한 대목을 인용한다.


 


‘연하는 원래 산수 즉 자연을 뜻하는 말이니 자고로 세속적 부귀와 공명을 부운(浮雲)처럼 여기고 속진을 떠나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삼아 요산요수(樂山樂水) 아유자기(雅遊滋氣)하는 현인달사(賢人達士)를 연하인이라 부른다. 이에 연하인의 아취를 동경하고 또한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짝한다는 뜻에서 연하반이라 명칭하게 된 것이니, 따라서 연하반은 산수를 애호 동경하는 이 고장 산악인들의 모임이다.(중략)


 


대지를 누비며 흐르는 맑은 물줄기와 산야를 덮은 원시림의 푸른 숲은 인류 발생의 원천이요, 원시문화의 발상지이며 또한 인류의 유일한 마음의 고향이었음에 상도할 때 오늘의 우리 민족은 조국강산의 황폐로 인하여 마음 둘 곳 없는 정신적 실향민이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통탄하는 바, 이에 우리 연하반은 잃어버린 녹지대, 마음의 푸른 고향을 다시 찾으려는 자연애호운동의 선구가 되어 민족적 정서운동의 줄기찬 분수가 되고자 자부하고 이 땅에 자연애호의 연하운동을 저마다 고장마다 일으켜 이름 그대로 금수강산을 이룩하는데 기여코자 함이니 이 강토 위에 아름다운 자연이 소생되어 우리 겨레가 마음의 고향을 다시 찾게 되는 날 근역(槿域)의 삶 위에 보다 서광 빛나리.’


 


1950년대 지식인들의 향취가 묻어나는 이 미문은 ‘한국 토종 환경운동의 원조 선언문’인 셈이다.


 


 


아버지의 고독


 


지리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이병주의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보듯 특별한 의미를 가진 해방공간의 산이다. ‘사상의 해방구’였던 지리산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한참동안 빨치산의 거점이 되었다. 이 공간이 독특한 분위기와 뉘앙스를 갖게 된 것은 그러한 역사 때문이다. 인간이 지닌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큰 그릇. 지리산은 실제로도 그런 기능을 했고 지금도 그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우두성 회장의 부친은 일본에서 전문부 대학에 다니며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했다. 당대 지식층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고 깊은 지리산 자락에서 자란 것 역시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 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방 이후 그는 고향에 돌아와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6·25, 5·16과 함께 냉전체제가 고착화하면서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요시찰 인물로 감옥에 갔다 왔는가 하면 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1970년대 초까지 우종수씨의 뒤에는 항상 형사가 따라붙었고, 타지에 가려면 반드시 신고를 해야 했다.


 


“5·16 때 아버지가 구속됐어요. 제가 여덟살 때였을 겁니다. 감옥에 갔다 오신 아버지는 말수가 적어진 대신 산에 더욱 매료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처음에는 의아스러웠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지요. 고초를 이겨내신 아버지가 의연해 보였습니다.”


 


여순사건 때 구례에서는 지역 지식인 700명이 희생당했다. 이때 많은 인재가 목숨을 잃었고, 살아있는 사람도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구례 최초의 산악회 연하반 결성 취지문이 ‘떠도는 구름처럼 살아가자’는 다소 허무적이면서도 유연한 도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우리 역사가 또 한 사람의 지식인에게 안겨준 한 자락의 비극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씨가 지리산에서 잡힌 것이 1963년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지리산에는 이른바 무장공비가 숨어살고 있었던 셈이죠. 아버지가 양한익 어르신과 함께 등반로를 개척하던 게 1955년이었어요.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고 있던 아버지가 산에 오를 때마다 어떤 마음이셨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무거운 고독을 느끼셨을 거예요.”


 


분단의 아픔 앞에서 아버지가 가졌던 고뇌를 이해하려 애쓰는 자식에게 물질적 어려움 정도는 장애가 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남다르다. 혹 재벌기업의 2세 경영인이라면 모를까, 유산이라곤 달랑 몸뚱아리 하나뿐인 소시민이라면 때로 아버지의 무능을 비판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나 그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차라리 신앙에 가까워 보였다. 아버지가 그의 일생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엄청나다는 방증일 것이다.


 


 


‘산사람의 길’


 


“아버지는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계속 경찰에 쫓겨다녔다고 하시더군요. 해방이 멀지 않았으니 학도병으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귀국해서도 경기도에 본부를 두고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친구들을 빼돌려 강원도 탄광지역이나 금강산으로 도망 보내는 일을 했답니다. 탄광에 자리가 생기면 다른 이들을 보내 강제징병을 피하게 도와주고, 자신도 그렇게 숨어 지냈다는 거죠.


 


아버지가 우리나라의 산에 심취하게 된 게 이 무렵이었다더군요. 금강산 동굴에 숨어 지내던 어느날 친구와 함께 온정리 장에 나섰다가 비로소 8·15 해방 소식을 들으셨대요. 그 길로 서울로 나왔는데 혼란상이 말이 아니어서 대전으로 내려가 친척이 세우는 대학에 가 계셨답니다. 그런데 이 친척분이 6·25가 터지면서 좌익으로 몰려 총살을 당했어요. 마찬가지 신세였던 아버지도 처가가 있는 구례에서 숨어 지내다 결국 체포됐던 거죠.


 


그렇게 한동안 좌절과 절망 속에 사시던 아버지가 구례에 정착해 지리산을 묵묵히 타기 시작했습니다. 구례는 해방 이후 빨치산 출몰지역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더 심한 수난을 당하셨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지리산을 떠나지 않으셨어요. 마치 아버지의 인생이 거기에 다 있는 듯이. 지금이나 되니까 이런 말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지, 저희 자랄 때는 입도 뻥긋 못했어요.”


 


그는 아버지와 동료들이 이름 없는 산봉우리마다 새로 이름을 지어주고, 자전거 물받이용 양철판을 사다 페인트칠을 해서 안내표지판을 만드는 것을 보며 자랐다. 서울에서 내려온 조사반이나 등산객들을 솔선해서 안내해주는 일도 지켜봤다. 산사람은 말없이 행동하고, 헌신과 배려를 우선해야 한다는 덕목도 그 시절의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우두성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에 다녔다. 3남2녀 형제 중 그가 유독 아버지를 따라다니기를 즐겼고, 아버지 또한 그를 장식품처럼 옆에 끼고 즐겨 산을 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우회장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부친의 일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만은 아니다. 본질은 마찬가지지만 수단이나 방법에서는 상당부분 다르다는 것. 아버지가 산림을 가꾸는 데 혼신을 다했다면 아들은 야생동물 복원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러나 오랜 동안 헐벗었던 지리산의 야생동물들은 상당수가 밀렵으로 멸종되거나 멸종 위기였다. 복원은 고사하고 사라지는 개체수만 자꾸 늘어갔다.  


 


“해방 전 산에는 사슴이나 늑대, 표범 같은 짐승들이 서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휴전선이 가로막혀 백두대간이 중간에 잘려나가면서 토착 야생동물은 살아남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1995년 심원계곡과 피아골에서 곰을보았다는 밀렵꾼들의 이야기가 들려왔어요. 이들은 곰을 잡으러 며칠씩 산을 헤매다니곤 했지요. 저 역시 명포수라는 말을 듣던 사냥꾼이었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산을 탔지요.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책감이 앞서더군요. 잡아서 엄청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부친의 삶의 궤적에 대해 깊이 알게 될수록 우회장은 자신의 삶이 하찮고 보잘것없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특별히 종교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불교와 가깝게 지낸 까닭에 살생에 대한 회의도 깊어졌다.


 


그가 생각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6년 3월 환경부 조사팀과 함께 곰 서식지 조사에 나서면서부터였다. 이 조사과정에서 불무장 등 여러 계곡에서 곰의 식이흔적이 발견됐다. 환경부가 곰 보호활동을 권고한 것도 이 조사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환경단체들도 야생동물 보호운동을 도와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우회장이 지리산 자연환경생태보존회를 결성하기까지는 이러한 우여곡절이 숨어있었다.


 


“숲은 국가에서 지키니까 야생동물은 지역민이 보호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출범하면서 우선 밀렵퇴치운동부터 벌여 나갔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회원 중에는 사냥꾼들이 많이 가입했어요. 운동을 펼치는 데는 이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엊그제까지 취미로 동물을 잡던 사람들이 동물보호에 앞장서자 그 의미가 컸고, 무엇보다 동물의 이동로나 생태계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보니 밀렵 실태파악이나 퇴치에 가속도가 붙게 된 것입니다.”


 


- 그래도 아직까지 교묘하게 밀렵구를 설치해 야생동물을 잡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많지요. 회원 가운데 한 분이, 감자에 폭발물을 집어넣어 나무에 매달아놓은 ‘감자탄’을 수거하다가 다쳐서 수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습니다. 올가미나 집게 같은 밀렵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매설돼 있어요.”


 


- 도구를 사용해 밀렵을 하는 것은 취미 때문만은 아닐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정력제다, 보약이다 하는 근거 없는 속설 때문에 야생동물을 잡는다고 봐야죠. 밀렵으로 생계를 유지할 만큼 개체수가 많다면 모르지만, 멸종상태에 있는 동물들을 싹쓸이하고 있으니 상황이 심각하지요.”   


 


 


곳곳에서 확인한 곰의 흔적


 


- 지리산에 반달가슴곰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


 


“처음 조사에 착수했을 때만 해도 40~50마리는 있다고 확신했죠. 그러나 조사를 계속할수록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5~6마리 정도 있다고 봅니다. 이중 절반 정도가 심원계곡과 천은사 계곡, 피아골 쪽에 서식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고요.”


 


- 한때 지리산 반달가슴곰은 사육곰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만.


 


“예전에 경찰에서 그런 발표를 했지요. 업자들이 곰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 사육곰을 풀었다가 다시 잡는 식으로 장난을 친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자들도 지난 40년간 곰 흔적을 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데 무슨 근거로 야생곰의 존재를 확신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정할 수 없었지요. 다시 현장에 들어가 조사한 결과, 서식흔적, 배설물, 나무 상서리(곰이 나무 위에 만들어놓고 노는 선반의 일종)를 여러 군데에서 발견했습니다. 그 흔적들 중에는 10년 전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나무를 할퀸 발톱 자국 등은 최근에 생긴 것이라는 점도 확인했고요.”


 


- 그런데도 직접 곰을 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리산은 넓고 광활한 산입니다.”


 


얼마 전 만난 브라질의 한 축구관계자의 지적이 떠오른다. 40년간 운영해온 클럽팀 구장에 선수들이 한번도 잔디를 밟지 않은 곳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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