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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版 林巨正 (학병거부자의 수기 제 1 부) - 하준수(河準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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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8월 20일!







 


1943년 8월 20일!


 


1943년(소화18년) 8월 20일! 일본 군국주의는 패전의 마즈막 고비를 앞두고  朝鮮人 징병제 실시의 全貌로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소위 學兵 되기를 강요하였다.


당시 중앙대학교 법학부 졸업반이었던 나는 같은 동료들과 더불어 고국에서 정간하는 신문보도를 읽어가며 우리들이 취할 바를 논의하였다.


즉 우리들은 학병이 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학병을 거부할 것이냐 이었다.


 


그리하여 그때 일치된 의견은 일본이 패할 것은 당연한 일이니 우리는 일본을 위하여 출전하기를 거부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故國에서 전하는 소식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었고, 굳센 이라는 우리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들이었다.


신문은 날마다 그 기능의 전부를 들어 우리를 욱박지르고,  우리 同族의 지명인사들까지도 솔선하다시피 나서서 우리 학도들을 꾀이고 또 달랬다.


 


소기(小磯)(1942년~1944년까지의 조선총독 '고이소'를 말함)는 그의 고시에,


너희들이 취할랴는 길은 장차 조선의 百年之計를 돕는 길이니 오늘의 너희들 한낱 과오로서 원한을 천추에 남기지 말라고 우리의 이성에다 권유하는가 하면,  


또 같은 고시 문 속에서 너희들 중에 혹시 나의 권고를 듣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들은 전부 徵用으로 보내어 勞役에 종사시키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는 同類는 빛나는 사관후보생으로 전지에서 공을 세울 때 너희들은 허잘 것 없는 노역부로서 그들에게 호령 받고 감시당할 수치를 생각해라.”……


 


이상의 소기의 글에서 내가 느낀 것은 들여다보이는 奸惡과 동시에 발버둥치는 일본제국주의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우리들의 이성은 그의 글 속에서 논리성의 결여, 논지의 자기당착과,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정치의 혼란을 발견하였다.


즉 일본제국주의는 마지막 계단에 도착하였다는 것, 일본의 부정은 이미 감출 수 없는 국면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의 아들을 부르는 볼모 잡힌 어버이들의 소리는 소기의 악랄한 수단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소리를 듣는 우리들의 가슴은 떨렸다.


 


그들의 소리는 마치도 고국에 잡힌 이가 두 손을 저어며 우리들한테 구함을 원하는 소리와 같았다.


약한 어머니와 약한 아버지와 그리고 또 약한 우리들의 祖國!


 


그럴 때 마다 나는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비록 우리니라는 약할지라도, 우리의 어버이는 약할지라도, 우리의 젊은이만은 약하지 않으리라!


 


 


 


歸  鮮


 


그들의 강권은 또한 그 뿐이 아니었다.


우리들이 유숙하는 아파트에는 매일과 같이 형사들이 찾아왔다.


 


우리들은 다 같이 자기 방에를 못 들어가고 일인 친지의 집을 찾아가며 전전하였다.


그러다 붙들리는 학생은 데리고 가서 강제로 지원을 시켰다.


그들 등살에 못 이겨 또 조선으로 가려면 또 차중 선중에서 경찰과 헌병에게 붙들리었다.


용케 피하여 조선까지 건너간 학생들도 다시 차중에서 하차하는 고향의 역에서 붙들리었다.


 


맨 처음 모여든 동류가 13인이었는데 그놈들 북새에 하나씩 둘씩 없어지고 결국에는 朴 동무와 나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러다가 朴 동무마저 자기네 고향 경찰서의 警部와 함께 동경에 찾아와서 데리고 갔으므로 우리 同類로서 東京에 남은 이는 단지 나 혼자이었다.


 


유일한 동무를 잃은 나는 더욱이 마음을 굳게 먹고 동경을 피하여 산리현(山梨懸) 산중으로 친척 동생 집을 찾아갔다. 그 곳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이주하여 농사를 지어 근근이 살아가는 집이었다.  


그러나 그곳 역시 安住할 곳은 아니었다.


간 지 20일도 못되어서 그곳에도 刑事가 찾아왔다. 나는 허는 수 없이 다시 東京으로 갔다.


 


아아 東京! 내가 과거 6년간을 살아온 東京이었으나 지금 내 눈앞에 비치는 東京은 오직 낯설고 싸늘한 얼굴이었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완전한 한 개의 客體에 지니지 않았다.


이러한 곳에 홀로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섭고 서글픈 일이랴.


 


이미 귀머거리가 되다 시피하고 거닐던 나의 귀에다 故國은 얼마나 오라고 불렀으랴.


朝鮮으로 갈까.


그러나 이제 새삼스러이 故國을 찾아가서 무엇 하리.


우리들의 고국은 이미 우리들을 배반하고 말은 것을....차라리 나도 지원하여 버릴까.


 


이미 동무들이 모두 다 끌려간 이 마당에 있어 나 홀로 거러지처럼 쫓기어 다닌댓자 별수 없는 노릇이다. 나 홀로가 지원하지 않는다고 얽매인 쇠사슬이 풀릴 리도 없지 않나.


지금 당장에라도 지원을 하면 나는 우리 고향에도 갈수가 있다.


 


죽는 것?


오늘에 있어 우리들한테 죽음이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죽는 게 두려워 피해 다닐 자가 우리 동포 중에 단 하나라도 있었을까. 만약 우리들이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한다면 아! 아! 그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잘 곳조차 없는 나는 생각다 못하여 최후로 川口에 사는 山田이라는 日女의 아파트를 찾았다. 山田은 소학교 女訓導로 또 나의 武道弟子였다.


나는 空手의 유단자로서 말하자면 4段인데 나는 한편으로 日大를 비롯하여 다른 도장에 가서도 지도를 하였든 관계상 그와 나와는 소위 사제지간 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 몇일을 묵는 동안에 이렇게 동경에서 피하여만 당기는 게 구차스러울 뿐더러 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 절실하게 느끼어졌다.


 


조선으로 가자! 죽더라도 조선에 가서 죽자.


 


그러나 죽어도 지원은 하지 않겠다. 다른 同類들이 모조리 끌리어 갔더라도 나 혼자만은 언제까지든지 지원하지 않겠다. 그 이유는 죽더라도 지원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奔  走


 


이렇게 결심하고 이제 동경을 떠날려던 몇 일째 거리에서 뜻하지 않게 同志동무를 만났다.


나는 그도 벌써 지원하였으리라고만 여겼었는데 뜻밖에 그는 노가다의 행세를 하고 남아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즉 그도 역시 쫓길 대로 쫓기어 다니다가 나중에는 이렇게 노동자들 틈에 섞여 지낸다는 것이다.


 


내가 朝鮮 가겠다는 이야기를 한즉 그도 역시 이곳에 있어 무의미함을 깊이 말하고 내가 먼저 나가는 대로 동정을 살펴서 전보를 치면 그 전보를 받는 대로 그도 곧 나오기로 하였다.


 


유일한 동지를 만나 나는 일인 행세로 車中船中의 가진 난관을 돌파, 그옇코 故國땅에 발을 디뎠다. 나는 배에서 나리는 길로 釜山에 있는 盧동무집에 찾아가 그의 부형께 동무소식을 전하고 그 이튿날 곧 歸鮮하라는 전보를 쳤다.


 


전보를 치고 나서 釜山역으로 나갔다.


그 때가 몇 일인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으나 1942년이 바야흐로 저물려는 즈음이라.


日女의 나막신소리와 일군의 어지러운 軍靴소리는 忽忙하게 엇갈리어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혼란을 드높은 천정에 反響시켰다.


 


내가 동경서 타고온 차표는 남을 주어버리고 나는 따로히 진주행 차표를 샀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더라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진주까지 가서 그날 밤으로 함양 가는 夜行 트럭을 잡아 탔다.


 


그때 차중에 일인이 하나 있어 처음부터 나를 쏘아보고 앉았는데 나도 낯익은 얼굴이라 생각을 가다듬어보니 그 자가 바로 나의 고향 함양경찰서의 형사이었다.


 


서로 겨눠보고 가기를 몇 시간, 함양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窮理 끝에 함양까지 가면 불리할 것을 깨닫고 함양 못 미쳐 15리 되는 어느 마을에서 트럭을 정지시켰다. 내가 나리니까 그도 거의 반사적으로 따라 일어선다.


나는 먼저 성큼 뛰어나리어 뒤를 따르랴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는 멈춧 하였다.


덤비면 해낼 작정이었다.


 


시간은 거의 자정에 가까웠고 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운전수에게 픽 웃고  오줌을 누고는 다시 트럭을 집어탔다.


그것은 내가 전에 함양서에 가서 武道를 가르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놈은 나의 실력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내가 그 길로 25리의 산길을 걸어서 집으로 가니 그동안 왜놈들은 세 번씩이나 父兄을 호출하여 지원하기를 권고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아내가 지어주는 밥도 뜨는둥 마는둥 동이 트기 전에 다시 집을 나왔다. 필경에 날이 밝으면 어제 밤 왜형사가 찾아올 것이 정한 이치였고 설레는 마음은 까닭없이 서울로 가기를 재촉하였던 것이다.  내 고향 나의 집도 인제는 안주할 자리가 되지 못하였다.


 


나는 산길을 도보로 진주까지 나와 진주서 차를 타고 서울 장사동 李동무의 집을 찾아갔다.


이동무도 지원출정하기로 결정, 나는 또 개성 사는 박동무의 집엘 찾아갔다.


박동무 역시 지원출정하기로 결정, 가면은 가는 곳마다 찾으면 찾는 곳마다 지원이요 出征이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血書 지원들까지 속출하게 되었다.


 


하늘은 무너지거라!


조선의 희망은 뒤집히거라!


 


그저 양 눈이 아득하여진 나는 무작정 뻗대고 설라고 하였다.


 


굳세이기 위하여. 굳굳하기 위하여.


 


 


 


學 徒 出 征


 


개성서 서울로 돌아온 나는 장사동 李동무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몇 일후에 출정할 여러 學友와 서로 만나서 연일 술을 마셨다. 마시고는 떠들고 떠들고는 울었다.


1월 20일(소위 학병의 날)을 앞두고 서울 거리의 술집이란 술집은 출정할 학도들로 하여 발칵 뒤집어 지다시피 하였다. 무엇 때문에 또는 누구 때문에 나가는지도 모르고 出征하는 그대들의 심사는 오즉 감출 수 없는 絶望과 自葉에 찼다.


 


그네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난폭하였고 떠들며 들부수는 그네들의 두 눈은 자리 잡히지 못하고 언제든지 허공중에 떴었다.


어린 학도는 술에 겨워 소변간에 가서 吐하면서 울었고, 또 어떤 學徒는 파출소 유리창을 부수면서 울어버렸다.


이렇게 그네들은 죽어러들 나갔다. 무엇 때문에 또는 누구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네들이 이렇게들 죽으러들 나가는 것이 결코 일본을 위하여가 아니라 결국에는 조선을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온갖 의미를 떠나서이였다.


 


그들은 누구나 朝鮮을 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朝鮮을 아르킬 길도 방향도 몰랐다.  그들은 죽음으로서, 오즉 죽는 것으로서 朝鮮을 위하랴든 것이었다.


 


그들은 젊었다. 그들은 모두 다 죽고 싶었다.


나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왜놈들을 아직 미거한 그네들은 얼마나 부러워하였을까.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서 朝鮮을 위하는 유일한 수단이요 方途이었다.


 


나는 學兵 되기를 거부한 자요, 학병 되어 나가는 그들을 반대하였지만 그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을 전송한 다음 나는 등신만 남은 사람처럼 되어서 다시 경부선 차를 탔다.


고향으로 가려든 것이었을까. 아니었다. 이제부터 나에게는 고향조차 없었다.


나는 그 동안 盧동무의 소식을 알기 위하여 부산으로 가려 하였다. 그가 무사히 건너 왔을까.


건너와 있다면 나의 가슴속에는 그와 만나서 논의할 어떤 궁리가 있었다.


 


부산에 가니 盧동무가 이틀 전에 무사히 와 있어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옇고 나의 계획을 말해 보았다.


 


나의 계획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둘이서 몇 해가 되던 간 일본이 패할 때까지 산중생활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특출한 계획도 아무것도 아니고 끝끝내 학병 되기를 거부하려면 어쩌는 수 없이 행하여야 될 절대적인 조건의 하나이었다.


 


그 이튿날 진주까지 온 우리 둘은 함양까지 산길을 걸어서 밤늦게야 우리 집에 들렀다.


내가 훌훌이 다녀 간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집안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다녀갔든 날 아침에 함양경찰서에서 형사 5,6명이 나왔었고 그리고는 요사이도 하루걸러 씩 찾아들 오니까 빨리 몸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盧동무와 나는 그날 밤 눈도 부치는 둥 마는 둥하고 일어나서 쌀 두말씩을 지고 집을 나섰다.


그리하여 산골로 산골로 파고 들었다. 가도 가도 산이요 나무뿐이었다

얼마를 가니 벌써 해도 대낮이 지났는데 첩첩산중에 좁다란 비탈길이 있어 그 길을 여나무살 밖에 안 되는 樵童이 하나 나무집을 지고 나려온다.

이러한 곳에도 인가가 있는가 싶어 우리 둘은 소생한 듯 기뻐하였다.

초동에게 물은 즉 이 산이 바로 덕유산이요 이 산속에 우리들이 찾는 은신골이 있다한다.


[隱身 골]

은신골이란 李太祖의 스승 무학대사가 모함에 몰려 몸을 피하신 곳으로 우리가 특히 이곳을 피신처로 정한 것은, 그 곳이 궁벽한 산중이라 아랫마을과의 연락이 거의 끊어지다 시피 하여서 불편은 하지만 피신처로 가장 적당한 것과, 내가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사냥을 잘 다녔기 때문에 이곳 지리에 밝은 것이 그 중요한 이유였다.

 

그렇지만 아직 나이 어리고 세상풍파에 부대끼지 못한 우리들이 일본관헌의 눈을 피하여 장차 몇 해가 갈는지 알 수 없는 피신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다뭇 비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무학대사의 옛 연고를 본받아 또한 우리의 앞길을 축원했던 것이다.


솔나무 박달나무 도토리 낙옆송 달래덩쿨...... 등이 욱어져 서로 얼켜서 열자 밖을 내다 볼 수 없는 곳인데 그 사이로는 오즉 비탈길이 좁다랗게 나있을 뿐이다.

그 길을 걸어 올라가니 어느 듯 해가 기우른 듯 사방이 점점 어두워졌다.


어데서인가 별안간 휘이익 하고 한 마리 이름모를 새의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무슨 새인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간곳이 없었다.

어려서 죽은 넋의 사모친 소리인 듯  그 소리는 듣는 이의 전 심금을 꿰뚫고 몸서리치듯 사라졌다. 그때부터 우리들의 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허황되게 빨라졌다.


초동이 알려준 대로 비탈길을 넘으니 뜻밖에도 조그만 등불이 하나 반짝거린다.

가까이 가니 조그만 화전막이었고 부엌에서 젊은 아낙네 하나이 저녁을 짓고 있어 우리가 염체불구하고 하룻밤 묵고가기를 청하니 여하튼 그러면 방으로 들어가란다.


방바닥에 거적하나 깔았고 사방 바람벽은 황토 흙이다. 기름불을 달려주고 나가는 젊은 아낙네의 발엔 아직 겨울인데 신도 없었고 버선조차 없었다.  대체 이집이 무엇 하는 집인가.

식구라고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아니하고 엄동산중에 젊은 여인네 홀로 살고 있을 것인가.


보아하니 이집 아낙네는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요부 같지도 또는 여우가 화한 요녀 같지도 않았다. 그의 얼굴은 순박하였고 그의 행동은 조금도 스스럼이 없었다.

이러한 산간에서 우리들 같은 길손을 처음대함에 흡사 一家친척을 대하는 것 같았고

흡사 저의 오랍동생이나 대하는 듯 하였다.

솜도 두지 않은 옷에 신과 버선조차 신지 않은 젊은 여인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의 눈에는 조금도 이상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우리들은 비로소 자기 집에 와 앉은 거와 같은 안도감을 느끼었다.

얼마만일까. 몇 해만일까. 安宅의 곳을 찾은 듯이 우리들은 숨을 돌리고 마음껏 두 다리를 뻗었다.

그때 이었다. 지게문밖이 떠들썩하면서 억센 사나이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었다.

 

 

1 Comments
가객 2007.07.15 00:11  
해방직후 1946년 잡지 "신천지"에 3회로 나누어 연재한 글입니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의 토대가된 작품이기도 한 하준수의 유일한 기록물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를 복사해서 옮기는 과정에서 원문 의 철자법은 현대어에 맞게 약간 수정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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